▲지난 6월 26일 오후 일본 규슈 이이즈카 시민회관에서 열린 '규슈지쿠호지역 강제동원노동자 증언 집회'.
오마이뉴스 장재완
[아소 탄광에서 일했던 공재수씨] "배가 고파 살 수가 없었다" 먼저 증언에 나선 공재수씨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 이촌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돕고 있다가 징용장을 받았다면서 증언을 시작했다. 그는 1943년 2월 1일 120명의 양주군청에 모인 청년들과 함께 양주부대로 편성되어 의정부역을 출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거쳐 큐슈 이이즈카에 도착했다.
아소광업(주) 쓰나와케광업소 아카사카탄광에 배치된 그는 채탄부로 일했다.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 식사 후 7시에 갱내에 투입되면 모든 작업을 끝내고 목욕을 한 뒤 숙소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공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노예와 같았다"면서 "식사는 알곡 한 톨 없는 콩깻묵 죽순 등으로 섞어 주었고, 그것도 너무 부족해서 배가 고파 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고픔과 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두 번의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혀와 죽을 만큼의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탄차가 중도에 탈선되어 발등에 부상을 당해 수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치료 받는 동안에는 콩깻묵 밥도 주지 않고, 멀건 죽만 하루에 두 끼만 주었다고 말했다. 봄이면 너무 배가 고파서 야산에 나는 명아주 풀을 뜯어서 증기물에 데쳐 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1944년 4월경에는 그 일대에 전염병(장티푸스)이 만연하여 같이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수백명이 일시에 병원에 입원,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병원은 말이 병원이지 창고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침대도 없는 임시 수용소였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작은 계단도 네 발로 올라갈 만큼 힘이 없었고, 수개월의 투병생활로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가죽과 뼈만 남아 말 그대로 '괴물'의 모습이었다고 공씨는 전했다.
1945년이 되어서는 전쟁이 가까운 곳에서 치러지는지 폭격소리와 전투기 소리가 자주 들렸고, 그럴수록 노동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8월 15일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오늘 정오에 일본 천황의 중대한 발표가 있으니 광장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일본 천황의 항복연설을 직접 들었다. 그러나 그날도 그들은 갱도에 들어가 작업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드디어 유엔군이 탄광을 접수한 8월 30일, 노동자들은 귀국을 위해 탄광을 출발했고, 나가사키 하가다로 가서 어선 두 척을 구해 700여명이 부산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 선주는 부산으로 가면 배를 빼앗기고 구속된다며 대마도에 머물렀고, 대마도에서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2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개죽음 당했는지..."6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다는 공씨는 증언을 마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얼마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때 그 당시 우리를 감시하고 구타하던 그 사람들, 지금 어디에 살아있는지 몰라도 이제는 꼭 나와서 있는 그대로를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도망하다 붙잡혀 그들 손에 희생된 영혼들, 아무런 빛도 없이 병들어 죽은 영혼들, 깜깜한 갱내에서 돌 더미에 묻혀 죽은 조선인 영혼들에게 이제는 정말 속죄하는 마음으로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끝으로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씻어야 할 것이 있다면 씻어야 하고, 위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위로해야 한다, 그래야 가까워질 수 있다"면서 "지금처럼 그대로 두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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