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동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자료사진)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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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잘 닦고 있다 주지 맡아서 똥 밟은 기분이었지. 허허허…."지난 2007년 3월 서울 강남의 봉은사를 불쑥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명진 스님이 던진 첫마디였다. 법랍(法臘) 30년의 이판승(理判僧,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는 중)이 졸지에 사판승(事判僧,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관리하는 중)이 되었으니 '똥 밟은 기분'이 들 법도 했다.
사실 명진 스님이 2006년 11월 천년고찰 봉은사 주지에 취임한 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일대 사건'이었다. 강남 노른자위 땅에 들어서 있는 봉은사는 사판승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맡아보고 싶어 하는 큰절이다. 그런데 명진은 사판 경력이라고는 학승들에게 이끌려 1987년 서울 개운사 주지를 1년 한 것이 전부인 선승(禪僧)이었다.
"도(道) 잘 닦고 있다 주지 맡아서 똥 밟은 기분이었지"그는 성철 스님이 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이후 해인사와 경북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만 2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동안거-하안거를 수행하면서 선승들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봉암사 산문을 폐쇄해 1940년대 봉암사 결사의 선맥(禪脈)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섰다. 봉암사는 지금도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여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선승에게 1년 예산이 100억 원이 넘는 큰절의 살림을 맡긴 것이다.
더구나 명진 스님은 지관 총무원장 선출 당시에 반대편에 섰다. 그런데 당시 지관 총무원장은 자신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했던 스님들을 주지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반대편에 섰던 '반골' 스님을 서울 강남 한복판의 큰절에 보냈다. 명진 스님은 많은 스님들이 가고 싶어 하는 부자동네 큰절의 주지로 자신을 보낸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봉은사 주지로 취임하기 전에 강원도에 갔다가 차가 뒤집히는 큰 사고를 당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 사지는 멀쩡했다. 그때 차에서 거꾸로 기어 나와 뒤집힌 차와 내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뒤집힌 승용차 사진은 지금도 내 휴대폰 바탕화면에 있다." 명진 스님 휴대폰 바탕화면의 뒤집힌 승용차 사진은 봉은사 개혁을 통한 불교 개혁이 자신의 '운명'임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는 다짐이다. 실제로 그는 임기 4년의 주지로 취임한 이후, 신도들에게 산문 밖을 나가지 않는 천일기도를 약속해 이를 실천했다. 또 봉은사의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불전함의 관리를 신도들에게 맡겨 1년 시주액을 80억 원에서 125억 원으로 늘렸으며, 사찰을 인근 시민들에게 개방해 일요법회 참석자 수를 150명에서 1000여 명으로 크게 늘리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 명진 스님이 봉은사를 개혁하다가 다시 '똥 밟은 기분'이 되었다. 부자 동네에서 현 정권을 비판하는 명진 스님에 대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 낙인' 때문이다. 명진 스님은 21일 오전 일요법회에서 1500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이렇게 폭탄 선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