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에게 박근혜는 적일까, 동지일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이명박은 적일까, 동지일까? 사진은 지난 2007년 1월 한나라당 신년인사회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오마이뉴스 이종호
때로는 나무보다 멀리 떨어져 숲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역사의 변곡점을 되짚어보면 '실언'이 나중에 '계산된 발언'이었거나 세상을 뒤흔든 대사건의 전주곡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사안 자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성이 클 때는 일부러 실언을 가장해 흘리는 경우도 있다.
이동관 홍보수석은 지난달 28일 청와대 기자들과 산행을 하면서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의 '중대 결단'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를 자처해온 '핵관' 수석의 말인지라, 모든 언론이 "국민투표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투로 기사화했다.
그런데 한 지방신문이 이 수석이 같은 날 '중대 결단' 발언 말고도 'TK(대구경북) X들'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더 확산되었다. 그러자 'TK 비하' 발언을 극구 부인하고 나선 이 수석은 '중대 결단' 발언에 대해서도 "민주적 토론을 거쳐 결론이 나면 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국민투표의 '국'자도 얘기한 적 없다.""○□의 '○'자도 얘기한 적 없다"는 말은 흔히 가장 강도가 센 부정의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초강도의 부정도 나중에는 거짓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서석재 전 총무차장관의 '전직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설' 폭로 때도 그랬다.
서석재의 '4000억 비자금설' 실언과 이동관의 실언김영삼 정부 시절인 95년 8월 1일 당시 서석재 총무처장관은 여름휴가를 앞두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전직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설'을 흘렸다. 그러나 일부 언론 보도로 파문이 커지자 서 장관은 3일 서둘러 자신의 말뜻이 잘못 전달됐다는 해명 회견을 갖고 진화에 나섰다. 당시의 문답이다.
- 발언의 전말은 무엇인가."지난 1일 저녁 몇몇 기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취중에 가볍게 얘기한 것이 와전됐다."
-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은 누굴 지칭하나."시중의 얘기임을 전제로 들은 대로 '과거 권력주변의 상당한 실력자'가 4천억 원의 처리방법을 놓고 고민한다더라는 말만 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름 한자 나온 적이 없다."
그때도 YS의 오랜 측근인 서 장관의 단순 실언인지 계산된 발언인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설이 사실로 확정되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박계동 의원이 그 해 10월 1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비자금 관리자와 계좌번호 등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의혹을 폭로함에 따라 전직 대통령 비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처음 열린 것이다.
되짚어보면 95년 당시 임기 중반을 맞은 YS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취임 초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던 국민은 6·27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에 참패를 안겼다.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친 탓과 미숙한 국정운영 그리고 대구 지하철 참사와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악재도 한 원인이었다. 또한 92년 대선 패배 후 은퇴를 선언했던 평생의 라이벌 DJ(김대중)가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정계복귀를 기정사실화한 것도 YS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민정계는 인기 없는 여당에 남아 있다가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또 96년 총선을 앞두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공천 물갈이를 할 경우, 민정계가 0순위가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컸다. 위기의식은 탈당과 독자정당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럴 때 터져 나온 것이 서석재의 '전직 대통령 4천억 비자금설'이었다. 민정계에 대해 '까불지 마라'는 경고였던 셈이다.
물론 그 뒤로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이건 '결과'로 보면, YS는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
'희한한' 정운찬, 총리 지명 받자마자 '세종시 수정' 발언이동관 수석의 '중대 결단' 및 'TK 비하' 발언이 완고하게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수석이 설령 'TK 놈들'이라는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첨단의료복합단지 특혜' 발언만으로도 그는 중대한 실언을 했다.
그러나 MB는 그 닷새 후 대구를 방문해 "왜 (TK는) 만날 피해의식만 갖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희한하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이 수석이 먼저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닦아놓은 길을 MB가 걸어가는 그런 '희한한' 모양새다. '핵관 수석'과 대통령의 교감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되짚어보면 선진당의 대표였던 충남 공주 출신의 심대평 의원을 총리후보로 지명하려다가 선진당의 반대로 무산되자 '희한하게도' 다시 공주 출신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후보로 지명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MB가 왜 그토록 세종시 지역(충남 공주-연기) 출신 총리후보에 연연했는지를. 집권 2년차 총리 지명의 1차적 기준이 공주-연기 주민과 나아가 대전-충남 주민 설득에 있었음을.
지난해 9월 초 총리후보로 지명된 정운찬 교수가 지명 소식을 듣자마자 기자들에게 뜬금없이 "세종시 계획 수정 필요" 발언을 한 것은 더 '희한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서울대 총장이었던 그가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교육(3불)정책과 부동산정책을 비판한 적은 있지만, 세종시 관련 공개 발언은 고작 이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내세워 지역을 고루 발전시킨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행정 불균형 아닌 교육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다."(2006년 11월8일 서울 강남초등학교 특강)"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왔다 갔다 한 데다 행정중심복합도시·신도시 등 개발정책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게 됐다."(2006년 11월28일 미래에셋증권 투자포럼)'세종시 방탄' 정운찬 카드의 본심은 '박근혜 견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