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 천하제일관 편액.
김광수
오삼계가 보낸 사절을 융숭히 대접해 보낸 도르곤은 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산해관에 도착했다. '천하제일관문'이라는 편액을 이마에 붙이고 떡 버티고 서 있는 산해관을 바라보는 도르곤은 감회가 깊었다. 철웅성 산해관을 피해 북경에 입성하고자 장성 북쪽 산악을 그리도 올랐는데 이제는 모두가 헛발길이 되었다.
산해관 관문을 두고 두 세력이 마주했다. 지는 해 명나라와 떠오르는 해 청나라다. 오삼계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왔다. 도르곤과 오삼계가 마주 섰다. 도르곤의 뒤에는 범문정과 홍승주 용골대와 소현이 있었다. 오삼계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항서를 바쳤다.
항복서를 받아든 도르곤이 오삼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겼다. 허나 적을 대하는 살기등등한 눈초리가 아니라 연민과 애증이 교차하는 눈초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현은 눈을 의심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숭정제는 몰라도 홍승주와 오삼계는 알고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조선의 선비들이 제일 흠모하는 인물이 문인 홍승주, 무인 오삼계였다. 특히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이순신은 몰라도 오삼계는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지 46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잊혀진 장군이었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핍박을 받았지만 전사 후에도 백성들의 입에 거론되는 것을 차단당했다.
비록 선조 조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해 조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수사일 뿐, 일반 백성들에게 영웅시 되는 것을 조정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일대기를 다룬 <이충무공전서>가 그의 사후 197년이 흐른 1795년,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유득공이 편찬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가 증발했다. 누굴 믿고 의지해야 하나?충신의 상징으로 존경받던 홍승주는 이미 항복해 청나라 사람이 되어 있었고, 명나라의 마지막 대들보 오삼계가 오랑캐의 장수 도르곤에게 항복서를 바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 오삼계마저 청나라에 항복하면 우리 조선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여 일어서야 하는가?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는 지금 이 순간 대륙에서 사라지고 없단 말인가? 최명길이 명과 내통하여 심양까지 끌려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되었단 말인가? 김상헌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명나라와의 의리는 누구와 지켜야 한단 말인가?"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대안을 수립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오삼계가 성문을 열어젖히고 청나라 군을 맞아들였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다. 산해관 성문을 들어서는 도르곤은 감회가 남달랐다. 격전을 치르고 피의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이곳을 피하기 위하여 북쪽 산악을 얼마나 올랐던가? 이렇게 쉬 열리리라고는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