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정문 오문
임충구
드디어 내성에 도착했다. 내구외칠(內九外七)이다. 아홉 개의 문이 있는 황성권역이다. 도르곤이 행렬을 정지하고 차비를 재정비했다. 순치황제로부터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 삼고 말에서 내려 가마를 탔다.
도르곤의 행차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조양문을 통과했다. 조양문은 원래 황성의 식량이 드나드는 문이었으나 오늘은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간 문이 되었다. 연도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환영했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간 나쁜 놈들을 몰아낸 군대다.""황제를 죽인 비적들을 토벌하러 온 부대다." 인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북경 사람들의 청나라 군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잡고 경의를 표했으며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다. 북경 무혈입성이다. 산해관 무혈입성에 이어 또 하나의 이변이었다.
무주공산 북경에 깃발을 꽂아라북경은 텅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자금성 정문에 도착했다. 오문은 불타고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금의위의 관원이 황제의 의장을 가지고 도르곤을 맞이했다. 금의위(錦衣衛)는 황제의 숙위부대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경호실에 해당한다.
도르곤은 금의위에서 대령한 황옥교로 갈아탔다. 황옥교(黃屋轎)는 황제가 타는 가마다. 도르곤의 행차가 불타버린 태화문을 통과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태화전 주춧돌과 너른 광장이었다. 크고 웅장했던 자금성이 이자성 부대의 방화로 무영전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대명제국(大明帝國) 군대가 출정할 때면 9만여 명의 군졸이 모여 출정식을 가졌던 태화전은 불타고 광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소현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명나라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대륙의 지존이었다. 그런데 소현의 눈앞에 펼쳐진 명나라의 잔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천명이 떠난 명조(明朝)에게 10m 궁궐 벽과 50m 해자(垓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치스러워 보였다.
도르곤이 말하던 '큰 세상'이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되었다. '크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덮어버리는 더 큰 세계' 이것이 바로 '힘의 논리'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북경 접수한 도르곤 "황제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라"황옥교에서 내린 도르곤이 무영전에 자리를 잡았다. 좌우에 범문정과 용골대가 자리를 잡고 소현도 자리를 잡았다. 도르곤이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펼쳐 놓았다. 청나라의 징표다. 도르곤이 환관을 불렀다.
"황제는 어떻게 되었느냐?""
유적이 황성을 포위하고 대포와 화전(火箭)으로 성중을 공략해 왔습니다.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받지 못해 굶주리고 사기가 떨어져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유적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는 그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황성의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를 북쪽 진산에 장사지냈습니다." "이런 고약한 놈들이 있나? 우리는 비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백성들은 근심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황은이 망극하옵니다."궁궐에 남아 있던 관원과 환관 7천∼8천 명이 불탄 잔해가 어지러운 황궁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범문정! 황제의 장례를 성대히 거행해주도록 하라.""성은이 망극하옵니다."도르곤이 범문정에게 명했는데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은 명나라 신하들이었다.
이자성을 연금하라"이봐라. 용골대! 백성들을 약탈하는 도적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소탕하라.""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용골대는 부대를 편성하여 산서성으로 도망간 이자성 부대를 추격하라 명하고 내성의 아홉 개 문을 걸어 닫았다. 이것이 바로 북경에 무혈입성한 청나라의 최대 묘수였다. 모든 군대의 황성출입을 통제한 도르곤은 소현의 거처로 무영전 앞 행랑채를 지정해 주었다. 세자를 호위하던 무사들과도 분리되었다.
이자성 부대를 추격하던 팔기군에게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보정부(保定府)에서 패잔병 6∼7만 명을 뒤쫓던 팔기군은 이자성 부대가 버려둔 궁녀 1백여 명과 채단(綵段) 수만 필만을 획득하여 돌아왔다. 팔기군이 안정문에 당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용골대는 부대를 통과시키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 명했다.
이자성 반란군을 추격하던 오삼계가 부대를 거두어 부성문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 용골대는 급히 부성문으로 출동했다. 부성문은 황성의 땔감이 드나들던 문이다. 오삼계가 부대를 이끌고 부성문에 도착했다. 용골대가 성문을 열고 오삼계를 영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으로 드시지요."오삼계가 아무런 생각 없이 성문을 통과한 순간 도르레와 연결된 성문이 닫혔다. 낌새를 감지한 오삼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성중에 이자성의 잔당이 날뛰고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특명입니다."이자성으로부터 궁궐을 탈환하면 황자를 옹립하여 명조(明朝)를 이어가려던 오삼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청나라의 명나라 접수 작전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연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