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된 서하문자 창제규칙도. 6000여 자가 만들어진 서하문자는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형태였다.
모종혁
고유문자 창제하고 실크로드 무역로 장악해 번성한 제국서하는 면적이 한반도의 5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영토는 오늘날 동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바이터우(包頭), 서로는 간쑤성 위먼관(玉門關), 남으로는 란저우(蘭州), 북으로는 중·몽 국경선에 달했다.
송과 서역의 중간에 위치한 덕분에 서하는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을 장악했다. 서하는 중계무역로를 독점하여 세력을 크게 넓히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서하는 한족과 농경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탕구트와 유목 문화에 접목, 발전시켰다.
건국 초기만 해도 송의 관제를 모방했던 서하는 차츰 고유의 체제로 정비했다. 관직은 크게 문·무관에 상사, 중사, 하사 3계급으로 나뉘었다. 4부, 11주, 7군, 6현, 8진의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하여 제국을 원활히 통치했다.
서하 문자로 쓰인 <천성구개신정금령>(天盛舊改新定禁令·1149), <광정임신신법>(光定壬申新法·1212), <저년신법>(猪年新法·1215) 등 법전은 서하가 고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서하는 불교를 국교로 정해서 승려를 교육, 배출시키는 화상공덕사와 출가공덕사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각지에 사찰을 건립했다.
서하어는 티베트-미얀마 언어 계통으로, 중국어와 문법·발음 체계가 전혀 다르다. 서하문자는 6000여자가 창제됐는데,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문자로 어떤 자수는 40획이 넘기도 했다. 서하문자는 서하가 멸망한 이후에도 16세기 초까지 쓰여 24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서하는 문자 보급을 위해 각자사(刻字司)라는 인쇄국을 두어 음운과 단어를 정리한 교과서 <운서>(韻書)를 출판했다. 제국 곳곳에 설립된 학교에서는 서하어로 번역된 중국 고전 <논어>, <맹자>, <사기> 등이 가르쳐졌고 각종 불경 교육도 이뤄졌다.
국교가 불교였던 서하는 수많은 불교 미술 작품을 남겼다. 찬란한 서하의 불교 예술은 카라호토(黑水城)에서 발굴된 불상·불화·불탑 등에서 잘 나타난다. 고비사막에 은빛 사토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 카라호토는 실크로드 거점도시로 동서양의 온갖 진귀한 보물이 가득 찼었다.
1908,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카라호토를 찾은 러시아 코즐로프탐험대는 수십 점의 불상, 500여 점의 불화, 2만4000여 점의 고문서를 발굴했다. 코즐로프는 지인에게 "보존이 완벽한 고대 도서관을 발견했다"고 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였다. 한낱 퇴역군인이었던 코즐로프는 카라호토 발굴을 통해 세계 고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