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련성.오늘날에도 중국 단동에 구령성진이 있다.
이정근
“여기가 청나라 땅이란 말인가?” 청나라 땅에 있는 모래는 조선 땅에 있는 모래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국(大國)이니까. 허나, 자세히 살펴보니 조선의 모래와 다를 바 없었다.
주변의 산을 휘둘러보았다. 둥그런 모습이 조선의 산보다 더 못생겨 보였다. 산야의 풀과 나무도 그랬다.
청나라에 있는 것은 모두가 엄청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산천은 다를 바 없는데 조선을 옥죄는 청나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압록강을 건너온 청나라 군사들이 숙영할 군막을 짓느라 소란스러울 뿐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군졸들 이외에 백성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괴이했다. 청나라에 들어왔는데 청나라 사람들을 구경할 수 없다니 참으로 이상했다.
구련성에서 하룻밤 묵었다. 구련성은 고구려의 옛 성이다. 평지에 쌓은 성터는 허물어지고 을씨년스러웠다. 바로 눈앞에 박작성이 보였다. 압록강변에 우뚝 솟은 산성이었다. 청나라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로 강 건너 의주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정부는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련성은 폐허로 방치한 채 인근에 있는 박작성을 개축하여 호산장성이라 부르며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중국학자들을 동원하여 중국정부가 내세우는 근거는 명나라 명성화 5년(1469년)에 호산장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기록은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장왕 4년(645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몸소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태종은 침공이 실패한 3년 후, 그러니까 648년. 설만철에게 3만 군사를 주어 박작성을 공격하라 명했다. 병선을 동원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간 설만철이 박작성을 공격했다. 성주 소부손이 1만여 명의 병력으로 항전했고 안시성의 고문(高文)장군이 3만여 기를 끌고와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