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장대. 남한산성에 있다.
이정근
이어 양사가 합계하여 소를 올렸다.
"강화도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천연요새를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가하게 술 마시며 노닐다가 적의 배가 바다를 건너자 도망갔습니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과 원손을 버리고 도망간 검찰사(檢察使) 김경징, 부사(副使) 이민구, 강화유수 장신, 경기수사 신경진, 충청수사 강진흔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는데도 군사를 거느린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 경상감사 심연, 황해감사 이배원, 북병사 이항, 남병사 서우신, 전라병사 김준룡, 황해병사 이석달, 경상좌병사 허완, 충청병사 이의배는 적의 예봉을 꺾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산성으로 달려오지 않았으니 모두 잡아다 국문하소서."
"김자점과 심기원, 윤숙을 중도에 정배하고 김경징과 장신은 서쪽 변방에 유배 보내라. 신경원은 관작을 삭탈할 것이며 신경진과 강진흔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는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마라."
인조의 처벌은 솜방망이였다. 임금 곁에는 영의정 김류가 있었다. 김류는 검찰사 김경징의 아버지다. 대사헌 한여직과 대사간 김수현이 차자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무슨 도리가 있다고 그들의 사형을 용서하십니까? 혹시 이 사람들의 죄상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죽일 만한 죄가 있는데도 죽이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극형으로 복주(伏誅)시키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하며 사람들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너무 과할 듯싶다."
직언은 쓰고 감언은 달다양사가 합계하여 다시 주청했다.
"김경징과 장신에게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라고 명하셨는데 만약 사형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분노를 풀 수가 없으니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그들의 전공을 생각하여 차마 참살할 수 없으니 자진케 하라."
협수사 유백증이 권력 핵심을 겨냥한 상소를 올렸다. 협수사(協守使)는 남한산성 항전 당시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뽑아 협수사의 명칭을 주어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한 전시관직 이었다.
"신이 전하의 뜻을 보건대, 전하는 처음은 있으나 마지막이 없습니다. 의병(仁祖反正)을 일으킨 것은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임금과 신하 모두가 오직 부귀를 일삼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건대 권신(權臣)만 있고 임금은 없습니다."임금을 향한 직격탄이었다. 혼란기가 아니면 임금을 능멸한 죄로 능지처참에 처할 도발적인 상소였다.
"김류는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전에 폭주하였습니다. 김류는 화친을 배척하다가 전하께서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 계신 이후로 화친하는 의논에 붙어 윤집과 오달제를 묶어 보냈습니다. 당초 청인이 동궁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 김류가 곧 입대(入對)하여 따라갈 듯 하더니 동궁이 북으로 떠날 때에는 늙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였습니다. 김경징이 검찰사가 된 것은 그의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당초 강화도로 들어갈 때 제 집안 일행을 먼저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내관 김인이 분을 못 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경징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군율(軍律) 어디에 자진이 있습니까? 경징을 죽이지 않는 것은 형률을 잘못 쓴 것임을 이미 아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아셨으면 누구를 꺼려서 양사의 논계(論啓)를 기다려야 합니까? 합계(合啓)에 대한 답에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차마 처형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것도 김경징이 죄가 없다고 여기시지 않은 것입니다.조정의 신하들이 전하의 심중을 익히 알기 때문에 김류처럼 나라를 그르치는 자가 묘당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 있지만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차마 임금의 형세가 위(位)에서 외롭고 임금의 위세가 아래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종묘사직이 망하는 대로 맡겨두고 아무 일도 아니하고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감히 말을 하였습니다. 오직 결단하고 안 하고는 전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오늘날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는 윤방과 김류 뿐입니다. 이들은 재능도 없고 덕망도 없이 조당(朝堂)에서 녹봉만 받아먹으면서 임금에게 실책이 있어도 감히 한마디의 말을 올려 바로잡지 못하였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도 자기 몸만 돌보고 지위만 보전하려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을 형편없이 처리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오늘날의 변고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15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였다. 임금의 국정 난맥을 열거한 통박이었다. 상소는 임금의 실정을 찌르는 비수였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상소였다. 인조는 유백증의 상소를 가납하여 현직 영의정의 외아들 김경징을 사사하라 명하고 장신은 자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