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청나라는 조선의 배를 좋아했다.
이정근
청나라 군사들이 전리품으로 눈독을 들이는 것은 여자들이었고 곶감과 배와 옷감이었다. 종루 시전 포목전에 있던 비단과 삼베를 수레에 실어냈고 설 대목을 노리고 배오개 창고에 그득히 쌓여있던 곶감과 배를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특히 난생 처음 먹어보는 배(梨)는 인기품목이었다. 눈을 뭉쳐놓은 것 같은 사각사각 달콤한 맛에 매료되었다. 만주지방에서 생산되지 않은 배를 그들은 설리(雪梨)라 부르며 무척 좋아했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철군하는 병력을 수송하기 위하여 압록강 도하작전에 선박을 대량 투입했다. 3천명 이상의 군졸과 수레를 실을 수 있는 대형 병선과 크고 작은 선박이었다.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연실이는 공교롭게도 한 배를 탔다. 세 사람이 함께 탔지만 생각은 각각 달랐다.
소현세자는 패망한 조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했고 세자인 내가 압록강에서 배를 탔다. 이 배는 우리의 배가 아니라 청나라 배다. 내가 의도한 대로 이 배는 가지 않는다. 이 배가 가는 대로 나는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미래는 없단 말인가?” 강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석철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보고 싶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라도 알고 싶다. 원손이 태어났다고 기뻐하시며 전하로부터 축복을 받았던 네가 지금 이 순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니 이 어미는 가슴이 미어진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연실이는 좀 더 다른 색깔의 처절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배는 세자를 태울 준비된 배였지만 세자는 다른 배를 탔고 내 배는 무뢰한들이 탄 다음 황제를 태웠다. 세자 하나만을 생각하며 고이 간직하고 싶은 배였는데 운명이 장난을 쳤다. 내 배는 누구의 배인가? 내가 태워주고 싶었던 세자는 타지 말아야 할 배를 타고 괴로워하고 있고 세자를 태운 배는 배에서 이탈한 배를 애타게 찾고 있다. 그리고 이 배에는 베와 배가 가득 실려 있고 우리는 그 배를 타고 함께 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간택에 거명되었던 스물네 살 처자의 넋두리였다.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인의 울부짖음이었다. 죽지 못해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버린 여자의 피를 토하는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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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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