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전 편액.한자와 만주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정근
"너는 무슨 까닭으로 잡혀왔느냐?"
"나는 척화를 앞장서서 주장한 대간으로서 붙잡혀 왔다."
홍익한은 사헌부 관원이었다. 장령이면 정4품이다. 12월 14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인조가 홍익한에게 서윤(庶尹) 직책을 주며 평안도 보산성으로 떠나라 명했다.
이무렵 청나라 군대는 평안도를 휩쓸고 도성에 진입하고 있었다. 적지에 보낸 것이다. 이 때 이미 홍익한은 인조의 의중을 읽었다.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화의를 위한 희생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의 나라 조정의 관리 중에는 척화를 주장한 자가 많은데 어찌 유독 너 한 사람뿐인가?"
"내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남을 끌어들이겠는가.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홀로 나 한 사람뿐이다."-<일사기문>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한 사람은 홍익한뿐만이 아니었다. 조정대신들도 척화와 주화로 갈려 극렬하게 대립했고 태학생 김수홍 외 138명과 유학(幼學) 이형기가 오랑캐 사신을 참하고 청나라에서 보내온 국서를 불사르자고 상소 했다. 심지어 사간 조경은 용골대가 대동한 서달(西㺚)을 국문(國門)에 들이지 말라고 주청했다.
서달(西㺚)의 대장 47명, 차장 30명과 종호(從胡) 98인을 거느리고 조선에 입국한 용골대는 "청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평정했고 옥새를 획득했다. 서달의 여러 왕자들이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귀국과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차인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들도 함께 온 것이다"라고 완곡하게 밝히고 있으나 궁극적인 요구는 군신관계였다.
조정대신들의 갑론을박이 비등점을 향하여 치솟고 있을 때, 홍익한이 상소를 올렸다.
"오랑캐 사신이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오랑캐의 한(汗)이 보낸 사신을 죽여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보내소서."-<연려실기술>병자호란의 분수령조정의 공기가 험악하다고 판단한 용골대는 황급히 창경궁을 빠져나와 북으로 말을 몰았다. 북상 길에 임금이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밀서를 탈취했다. 밀서는 청나라와 화친을 끊었으니 국경 방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은 홍타이지는 대노했고 조선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분수령이었다.
2월 25일 심양에 도착한 홍익한은 심양궁 옥에 갇혔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감옥이었다. 3월 3일 답청일(踏靑日)이다. 우리나라는 삼월 삼짓날이라 하여 제비가 오는 날이라 하지만 청나라에서는 답청일로 경사스러운 날이다. 감옥에도 봄은 찾아왔다. 감옥에 파고드는 봄기운을 느끼며 홍익한은 시를 한수 읊었다.
양지바른 언덕에 새싹이 움트니/陽陂細草折新胎새장 속의 외로운 새 더욱 슬프구나./孤鳥樊籠意轉哀형의 답청 풍속 생각조차 못할소냐/荊俗踏靑心外事금성에서 들던 술잔 꿈속에 떠오르네/錦城浮白夢中來밤바람 돌을 날려 음산이 진동하고/風飜夜石陰山動봄물은 눈이 섞여 월굴이 열리누나./雪入春澌月窟開굶주리고 목마른 목숨 겨우 이어가는데/飢渴僅能聊縷命백년 눈물이 오늘에 뺨을 적신다./百年今日淚沾腮-<병자록>"왜 무릎을 꿇지 않느냐?"
홍익한을 바라보던 홍타이지가 호통을 쳤다.
"이 무릎을 어찌 너에게 꺾을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