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논을 경작하고 아내는 밭을 일군다. 잔리촌에서 남녀평등은 주민의식과 노동, 생활에서 확립돼 있다.
모종혁
'한 나무에 한 둥지만 틀면 새는 별 탈 없이 살지만,
한 나무에 여러 둥지를 틀면 새는 (결국) 굶어죽는다.''사람은 아이를 (끊임없이) 낳을 수 있지만,
(먹고 살아갈) 땅과 자원은 다시 낳아 만들 수 없네.''자식을 많이 낳는 집에는 농사지을 땅을 주지 말고,
자식을 많이 낳는 집의 딸은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
- 무분별한 인구증가를 경고하는 잔리촌 동족대가 중에서한 마을이 있다.
오지의 깊은 산골에서 1000여 년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소수민족 동족(侗族) 집단거주지. 오랜 세월에 걸쳐 과학적으로 풀기 힘든 약초와 조화로운 자연환경 속에 인구 증가를 철저히 억제한 신비의 마을.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구두(口頭)의 마을 규약을 조상 대대로 지켜온 주민들. 중국정부의 행정조사 이래 형사범죄 발생률 0%인 평화롭고 따뜻한 마을.
세계 최초·최고의 인구계획 촌락 잔리(동족어, 한자 표기는 '占里')다.
신비의 마을 잔리촌, 그 곳에 가다
중국 구이저우성 구이양에서 9시간을 달려서 닿은 총장 현청에서 다시 1시간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잔리촌.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후 오늘날까지 잔리촌은 150~160여 가구 700여명의 인구를 유지해왔다. 1952년 중국 최초의 전국인구조사에서 잔리촌은 가구 168호, 주민 729명이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가구 154호, 주민 739명으로, 가구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국정부는 1979년부터 강력한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농촌 거주의 소수민족은 예외로 두 자녀까지 둘 수 있다. 게다가 개혁개방정책 이전에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마오쩌둥의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정부는 적극적인 다산 정책을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950~70년대 중국은 기록적인 인구증가세를 보였지만, 1970년 잔리촌 주민 수는 729명이었다. 18년 전과 비교할 때, 단 한 명의 주민도 늘어나지 않은 것.
'중국 최초의 지화셩위 마을', '중국 인구문화 제1촌', '동족 문화와 풍습의 살아있는 생태박물관'…. 잔리촌은 한 가정에 오직 1남1녀만 낳는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마을로 유명하다.
잔리촌의 또 다른 비밀은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을 광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옛 전통과 문화풍속, 생활방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점이다. 잔리촌 동족은 홍위병과 지방 관료의 무자비한 파괴와 시퍼런 감시 속에서도 남몰래 1남1녀의 자녀 낳기와 민족문화를 지켜왔다. 그 전통은 21세기 첨단 현대문명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