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셩좡(盛裝, 명절이나 축제 때 입는 전통복장)에 열중인 한 묘족 여성. 셩좡 한 복을 맞추는 데 적어도 1500위안(한화 약 18만원), 순은을 사용할 경우 1만 위안(한화 약 120만원)이 든다.
모종혁
묘족 문화의 생태 박물관인 '천호묘채' 시장시장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시장 묘족의 전설에 따르면, 수천여년 전 치우천황 셋째 아들이 이끌던 부족은 지금의 장시(江西)성 일대에서 거주했다. 기원전 3000~2000년 전 탁록(涿鹿)대전에서 아버지 치우천황이 화하족(華夏族·한족)에 패하자, 셋째 아들은 부족을 이끌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묘족 가요는 장시성에서 구이저우에 이르는 긴 여정을 패퇴한 민족의 이동사가 아닌, 묘족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묘족문화의 체계를 다지는 자기발견의 역사로 노래하고 있다.
시장에 이른 묘족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왕조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발전시켰다. 많은 왕조가 흥망하고 수없는 전란이 중국 대륙을 휩쓸었지만, 시장의 묘족은 '관외'(管外) 지역으로 자치하면서 독립성을 유지했다. 18세기 청나라 옹정제에 이르러 정식 행정구역에 편입된 시장은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이후에야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치를 받게 됐다.
20세기 전반기 구이저우를 통치했던 군벌은 행정력 강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동화 정책을 획책했다. 그러나 깊은 오지인데다 왕래마저 불편한 지리적 위치는 시장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여 '원생태'의 문화적 토양을 유지케 했다. 리푸중(李福忠·63) 전 시장초등학교 당서기는 "간간히 장사를 위해 시장에 오는 외지인이 있긴 했지만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시장은 묘족만의 옥토였다"고 말했다.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은 묘족의 안식처 시장을 그대로 두질 않았다. 험난한 산길을 따라 시장까지 들어온 홍위병들은 묘족의 조상숭배사상과 전통문화를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로 규정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리푸중은 "문혁 때 시장을 찾은 홍위병들은 옛 문화를 고집스레 지켜왔던 시장 묘족을 핍박하고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면서 "10년간 시장 묘족은 숨죽인 채 조상을 모시며 묘족의 문화와 풍속을 근근이 이어갔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