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불사리탑사. 마당에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장태욱
보우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고 법명이 보우였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의 특별한 사귐으로 인해 문정대비(文定大妃)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문정대비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1548년(명종 3년)에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사찰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이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유생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문정대비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보우는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로 인해 그 뒤 6개월 사이에는 상소문이 400여건이나 올라왔는데 그 중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내용의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이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보우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연북정 근처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죽일 때는 손가락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사이를 실로 연결했다고 하니 그 방법이 실로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