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천포구에는 조천관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북포구와 더불어 2대 관문이었다.장태욱
조천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육지로 나가려고 할 때 '기후(天)를 살핀다(朝)'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 '천자(天)를 알현하는(朝) 곳'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진나라 시황이 현재 연북정 자리에 있던 바위에 '아침에 천기를 보았다'는 의미로 '朝天'이라고 썼던 것에서 유래한다는 주장 등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정확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 마을 주민들은 조천관이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지어졌다고 얘기하는데, 사료가 부족해서 그 정확한 설립연도를 알 수 없다.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대략 지금으로부터 800년 이전에 해안선에서 1km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주민들이 비옥한 토양과, 생활용수 공급과 어로활동이 용이한 곳을 찾아 지금 마을이 있는 해안으로 점차 이동해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본다.
고려 말의 혼란 이후 제주에는 많은 유민들이 유입되어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천재에 의한 기근이 자주 발생하여 이곳을 떠나려는 자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조선말에 외구가 자주 침범하고, 군역과 부역의 의무가 과중해지니 이를 회피하기 위해 몰래 도망하는 자들이 많아져, 제주의 자체방어에 어려움이 생겼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제주도민의 출륙을 금지시켰고, 제주여성들과 육지인과의 혼인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명을 내리기를 "부역을 피하고자 하여 육지로 몰래 나가는 자가 많으므로 조천과 별도(지금의 화북) 두 포구에서만 출입을 허락한다"고 했다.
이를 보더라도 조천포구는 화북항과 더불어 조선시대 제주도와 육지부를 연결하는 2대 관문 중 하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육지로 나가는 배들은 이곳 포구에서 바다가 잔잔해지고 풍향이 맞을 때를 기다렸다 출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