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대첩비. 고려시대 최영장군의 홍산대첩을 기려서 만든 비석으로 1977년에 세웠다. 홍산대첩은 그 당시 홍산 일대를 노략질하던 왜구들을 최영장군이 일거에 소탕한 전투를 말한다.송영대
여기에는 최영 장군을 기려 만든 홍산대첩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77년에 세운 것으로서 최영 장군과 고려군에 대해서 써있고, 홍산대첩의 대승에 대해 적혀 있다. 홍산대첩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최영 장군이 이끈 고려군이 왜구를 무찌른 사건으로 <고려사> 권 113「최영열전」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건은 이렇다.
왜구가 지금의 논산 개태사에 쳐들어와 원수 박인계(朴仁桂)를 죽이고 고려군은 패하게 된다. 이게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최영은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을 몸을 이끌고 왜구를 무찌르러 떠나게 된다. 이때 최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보잘것없는 왜놈이 횡포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지금 제어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았으니 또한 가히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사(宗社)를 편히 하고 왕실(王室)을 방위하고자 함이오니 원컨대 빨리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왜구와 싸우게 된 곳이 바로 홍산이었다. 홍산에선 당시 왜구가 크게 기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이들과 최영의 고려군은 맞닥뜨리게 되었다. 최영이 왜구와 맞닥뜨렸을 때 지형적 우위는 도리어 왜구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구의 단점은 수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고, 최영은 이 점을 이용하였다.
적의 위세가 강하여 다른 장군들은 쉽게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상황에서 도리어 최영 장군은 정공법을 택하였다. 정공법은 아군으로서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함도 있지만, 그 아군의 위세가 강할 시엔 도리어 적을 당황하게 함으로써 혼란을 줄 수 있다.
최영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최영이 앞장서서 돌진하고 적을 베자 적들도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적이 숲 속에서 최영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이게 입술을 맞추게 된다.
여기에서 최영은 역시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술은 피가 가장 나기 쉬운 부분으로 한눈에 보아도 몸에 이상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상황에서 최영은 침착하게 자신도 활을 쏘아 자기를 쏜 적을 죽이고 얼굴색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입에 맞은 화살을 빼내었다.
그러고는 다시 적을 향해 돌진하니, 아군의 사기도 하늘을 찌르게 된다. 결국 군사 수에서도 불리한 입장이었던 왜구는 그러한 정공법에 제대로 당하게 되고 그동안의 상승세를 이 한 전투로 마감하게 된다. 최영의 군사적 재능과 위기에 대한 대응력이 빚어 낸 고려군의 대승리로서 후세에 홍산대첩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