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어렵다고?

논술은 본능이다

등록 2007.08.06 17:43수정 2007.08.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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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초등학생이든 중학생, 고등학생, 혹은 직장인이거나 학부모가 되었든, 누구든지 상관없다. 논술은 어렵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생각하거나 가르치거나 의도하는 사람, 당신들은 전부 틀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틀림없이 논술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능숙하게 해왔고 당신에게 익숙한 것이 틀림없다. 이미 익숙한 것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숨 쉬는 게 어려워졌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위에서 논술은 어려운 것이라는 당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이제 증명해보기로 하자. 논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은 당신에게 이미 논술은 익숙한 것이라는 전제에 의한 것이므로, 우선 당신이 이미 논술에 익숙하다는 것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순서대로 일일이 사례를 들어가면서 증명하겠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애가 있고,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쭈-욱 지켜봤는데, 단점밖에 없어요."

어느 부모든 애들한테는 한두 가지의 약점 정도는 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단점밖에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 (살짝 떨리는 가슴으로, 그래도 아빤데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한마디로 비굴하게) 아빠 단점이 몇 가지나 되는데?"
"오십 가지도 넘어요."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어 딸애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딸은 단호하였다. 개수를 낮춰줄 용의는 추호도 없어 보였다. 앙 다문 입술, 그 단호함에 모락모락 화가 피어올랐다.

아빠 이전에 나도 인간이다. 너는 뭐 기특한 딸이기만 하느냐? 안 그런가?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쨌든 좋다, 유치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전-쟁-이-다.


"정말이지?"
"그럼요."
"다 적을 수 있지?"
"그럼요."

애가 누굴 닮아 이럴까? 슬쩍 마누라를 흘긴다.

"아들, 가서 스케치북 갖고 와."

눈치 없는 아들(이제 6살이다.)이 오늘따라 웬일인지 군말 없이 일어선다.

"다 적어 봐."

반주로 마시던 술, 이제 밥은 물 건너간 것이다. 새로 한 잔을 따르고 딸애는 연필을 힘껏 움켜쥔다. 어렸을 적 연필을 쥐는 힘이 좋아서 글씨도 좋고 그림도 좋다고 나에게 칭찬받던 그 손으로.

그 다음은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고 끔찍하다. 난 나의 딸이 그렇게 빠르게 무엇을 써 내려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순식간에 스케치북 한 장을 다 채우고 다음 장을 넘긴다. 난 내 눈을 의심한다. 저녁마다 일기 때문에 제 엄마랑 실랑이하던 게으른 딸은 어디 가고 고소장을 써 내려가는 분노에 찬 고소인, 혹은 분연히 도끼를 지고 상경하여 광화문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던 옛적 선비의 모습 등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벌렁 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스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낭독, 세어보니 그게 무려 52가지의 항목이다. 머리가 하여진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명색이 논술선생이 아니던가?

요약에는 몇 가지의 원칙이 있는데, 중요한 것만 설명하자면 부연 설명된 부분, 이건 필요 없는 부분이므로 삭제,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일반화하기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위개념을 상위개념으로 바꿔 일반적인 말로 간략하게 줄여주는 것이다. 그 외에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여기서는 본론과 상관없으므로 그만두자.

"외할머니가 싫어한다. 집에서 빈둥거린다. 술을 너무 마신다. 청소를 안 한다. 음식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담배를 피운다. 으음(이건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건 외할머니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지? 말하자면 부연설명이고 일반화시키면 이렇게 되지. … 음, 아빠는 외할머니가 싫어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한다. 뭐 그런 말이지? 맞지?"

잠깐 딸애의 눈빛이 흔들린다.

"좁쌀, 콩, 보리, 쌀, 기장, 팥, 모두를 뭐라고 줄여서 부를 수 있지? 곡식이라고 배웠지?"

학교에서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전투는 기본적으로 세(勢)의 문제인 것이다. 최선의 방어란 공격이 아니던가?

"맞아? 틀려?"

딸애가 잠깐 엄마와 눈을 맞춰보고는 대답한다.

"맞아요?"
"그러니깐 아빠의 단점은 52개가 아니라는 말이지. 맞아? 안 맞아?"

선수 특유의 감이 온다. 승기를 잡았다는 느낌이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이미 내친 발걸음이다. 논술은 생각과 말로 치르는 전투이고 이제 딸은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층들이 애용해 마지않던 전술, 무지 어려운 말과 논리로 권위를 세워 제압해버린다. 그런 식으로 전체를 읽어 내려가면서 최대한 요약을 시도했다. 솔직히 별짓을 다 했다.

남은 개수는 36개. 기를 쓰고 줄여보았는데도 36개라니. 한계상황이다. 벽을 마주한 느낌이다.

톡톡. 연필로 식탁을 두드리며 생각한다. 어떻게 수습해서 품위 있게 이 전장을 빠져나갈 것인가? 맥아더는 "전쟁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할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어쩌면 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경계에 실패한 아빠일 수도 있다.

애써 얻은 술기운도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아 자애로운 아빠의 섣부른 호기심에서 시작한 이 대화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반전주의자, 히피, 존 레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꼽고 뭐, 어쩌고저쩌고하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자꾸 딴생각들로 어지럽다. 그러나 이렇게 반성하고 앉아있을 시간이 아니다. 뒷마무리가 중요한 것이다.

퇴각이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아들은 여전히 밥을 뒤적거리고 있고, 와이프는 철저한 외면이다. 퍼뜩 내가 미리 짜놓은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정신을 차려보니 다 적으로만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다 적이었다.

혈혈단신. 적진 안에서의 고립, 비장감. 갑자기 다시 투지가 솟아오른다. 좋아, 다시 돌파다. 주로 왜냐 하면으로 시작되는 딸애의 총탄을 피해가며 기회를 노린다.

"야무(딸애의 아명이다. 야무지게 크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다. 정말 야무지게 커준 것인가?)가 지적한 것들(아빠는 모든 것을 매로 해결하려 한다는 항목이다. 일부 사실이다. 쉽게 상황정리가 되기 때문이다)은 전부 현상을 표현한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현상의 배후에는 언제나 전제라는 게 있는데, 아, 너 전제란 말을 아냐?"

말도 불친절해진 지 오래다.

"몰라요."

맙소사,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딸애는 이제 겨우 초등 2학년짜리다. 현상? 전제? 알고 있느냐고? 내가 너무 심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뭐? 스피드, 아니 품위 있는 퇴각.

"으응 전제란 건 말이지, 예를 들면 야무가 지적한 아빠의 단점들은 모두가 아빠가 야무를 사랑한다는 전제가 깔린 거라는 말이지."

제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기를. 딸애도 아빠의 애틋한 눈빛에, 사랑한다는 말에 주춤거린다. 관용의 시간이다. 똘레랑스란 얼마나 아름다운 개념인가?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말이 먹히고 있다는 느낌이 분명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되지 말라고 아빠가 잔소리한다는 말이지. 안 그래?"

이렇게까지 하고도 말이 안 먹힌다면 마지막만이 남아있다. 그래, 너도 나중에 아빠, 엄마가 되어 봐라, 너라고 뭐 다를 것 같냐? 뭐 그런 식의 꼴사나운 파국만이 준비된 것이다. 여기가 서로 품위를 잃지 않고 타협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것이다. 딸애도 그걸 알아주어야 할 텐데.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의미 없대."

쨍, 유리가 날카롭게 금가는 듯, 환청인가?

돌아본다.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 수저로 저으며 다리를 꼬고 싱크대에 기대서서 나를 바라보는 와이프였다. 배신. 아, 넘버3. 이건 알프스 산을 넘어온 한니발이고 자신을 아껴주던 시저를 암살한 양아들 부르트스, 그야말로 에띠 뚜 브르터스(부르트스, 너 마저도)이다. 대화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도 반응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와이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잔인한 배신.

마음 같아선 송강호처럼, 미친놈처럼 길길이 뛰고 싶은데, 너무나 결정적인 순간에 운명적인 등장에 아무 생각도 되지를 않는다. 머리가 완전히 멈춰 서버린 것이다. 승부의 주사위를 완전히 돌려 놔버린 전술적인 기동, 워털루 전투에서의 프로이센군의 등장 같은 결정적 국면에서의 3자 개입.

여태까지 살면서 운명적이라는 표현은 아직 써보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운명적 패배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결코 아름답지 못했던 패배가 도래하였다.

자기 전에 조용히 와이프에게 물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야무가 나를 닮긴 닮았나봐?"
"왜?"

뜬금없다는, 약간 거만스러운 눈초리. 아까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애가 논리적이잖아?"

잠깐 나를 돌아보고 나서야 아아, 아까 일? 알겠다는 듯 픽 웃고 돌아눕고 만다. 그 웃음이 무척 거슬렸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혼잣말로 이게 노신(魯迅)의 소설에 나오는 아Q의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이란거야, 이 사람아, 알지도 못하면서. 쯧쯧.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잠을 청한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돼. 대학원에서 아Q를 안 배웠으면 이 상황에서 어쩔 뻔 했어? ……. 그러나 역시 잠은 쉽게 와주지는 않는다.
#논술 #요약 #딸 #논술강사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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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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