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몬트 주에서 한참 북쪽으로 달리다가 드디어 반가운 'CANADA'가 적힌 표지판을 발견한다.문종성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드디어 캐나다란 글이 쓰인 표지판이 나온다. '멀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좀 더 힘을 내어본다. 낮과 저녁의 모호한 경계에 이르는 시간에 국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왔던 국도를 따라 국경검문소로 가려고 하니 길이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는다. 한 바퀴를 돌고 이번엔 우측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찾아냈다. 지난 번 고속도로 옆 바이크 루트 사건도 있고 해서 혹시나 자전거를 위한 길이 아닐까 들어가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길이 막혀 있었다. 좌측도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 표지판엔 국도 노선이 있는데 자전거로 빠져 나가는 길이 안 보인다. 중앙엔 고속도로만이 휑하니 뚫려 있어 차들이 운행할 뿐이다. 한참을 돌다가 안 되겠다 싶어 미국에서 가장 국경에 가까운 집에 가 물어보기로 했다.
"이 봐요. 안녕하세요?"
현관 앞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부자뻘로 보이는 두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무슨 일이야?"
"다름 아니라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길을 못 찾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는 거죠?"
"음, 자전거? 그냥 고속도로로 타고 가면 돼."
젊은 친구가 답해준다. 그러면서 식사는 했냐고 물어본다. 확실히 미국인들은 자전거 여행자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이 친구가 식사는 잘 챙기면서 다니는지 하는 의문인가 보다. 혹여 그게 립서비스라 해도 생각해 주는 게 어딘가?
"일단 들어와.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그 친구,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퍽 힘겨워 보인다. 눈짐작으로도 얼추 150㎏은 넘어보이는 거대 체구를 가진 전형적인 비만인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풍요로운 중부지방에서 삶의 무게가 리듬감있게 출렁거린다. 씩씩거리는 그보다 보는 내가 더 숨막힐 정도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James). 움직이는데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늙은 노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가 돌봐주는 환자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직업은 간병인인 것이다. 그는 캐나다에서 사는 캐나다인이지만 간병 때문에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임스, 이제 알았다구요"
샌드위치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어? 비오네…."
조심스럽게 밖을 보니 제임스도 나의 시선을 따라 밖을 응시한다.
"비 와?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넘겨버린다. 그러고는 서랍을 뒤지더니 지도를 꺼내온다.
"어디보자, 자네 몬트리올로 간다고 했나? 흠."
제임스는 얼마 동안 지도를 보고 연구하더니 내게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하고는 어떻게 몬트리올에 갈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내 생각엔 자넨 말야, 104번 국도를 따라 그냥 쭉 가면 되겠군."
"그래요? 알았어요. 104번으로만 가면, 음, 여기 몬트리올로 바로 들어가는군요."
짧고 명쾌하게 끝날 거 같았던 그의 조언은 그러나 이후로도 장장 한 시간동안 이어졌다. 한 시간 동안!
"글쎄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하지? 하이웨이는 힘들겠지? 음,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진입을 해야 하나? 몬트리올 시내 지도가 어디 있을텐데. 여기 있다. 보자, 104번을 타고 가다가 132번으로 바꿔 가든지 아님 그냥 남쪽으로 선회해서 가든지. 근데 퀘벡은 안 갈 생각이야? 거기 경치 죽이는데. 내가 말야. 자동차로만 몬트리올을 다녀서 그런지 자전거로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어."
기약없는 그의 만연체에 지쳐버렸지만 너무 열심히 도와주려는 그의 노력 때문이라도 '그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속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음…그러니까 어떻게 가는지 대충 알 걸 같아요. 이제 알았…."
"봐, 갈렙. 자넨 말야, 지금 이 길이 이쪽으로 빠지면서 다시 북쪽에서 만나거든? 알겠어?"
"제임스, 알아요. 그렇게 가면 될 것 같군요. 이제…."
"그런데 말야, 혹시 이 길로 가게 되면 강을 만나게 되고…."
제임스는 펼친 지도 위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길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어찌나 가쁜 숨을 헐떡거리는지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요'라는 말을 꼭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의미가 될지도 모를 음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봤어? 이래봬도 내가 몬트리올에서 여기까지 차로 몇 년을 왔다갔다 했는데. 하하. 이런 건 뭐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라구."
헉! 윈도95
다시 비가 쏟아지는 밤, 난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인터넷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내 컴퓨터로 한 번 해 봐."
슬쩍 웃어보이는 그의 표정이 할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컴퓨터 전원을 켰다. 하지만 화면은 나무늘보의 움직임만큼이나 답답하다.
첫 화면이 나오는데, 어라….윈도95.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윈도95라니. 아니 이 친구는 이 고물상자를 가지고 제대로 인터넷을 활용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메일이 좀 늦게 보내져. 가끔 다운도 되고. 그래도 뭐 바꿀 생각은 없어. 난 인터넷과 거리가 멀거든. 뭐 없다고 해도 크게 불편한 걸 못 느껴서 말야."
제임스는 자신의 컴퓨터가 느리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내가 인터넷을 쓰고 싶다고 요청을 했을 때 선뜻 응해주었다. 이를테면 구차하게 말로서 이해시키기보다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하게 한 뒤 자신의 의도를 피력하기 위한 일종의 복습법이었다.
"사실 내 컴퓨터가 보다시피 느려. 그러니까 밖에 나가면 기사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휴게소가 있거든? 거기 가면 아마 무선인터넷이 될거야. 내 차로 그리로 가는 게 어때?"
"비도 오고 시간도 꽤 늦었는데 괜찮을까?"
"문제 없어. 차로 5분이면 되는데 뭘."
오, 주님, 지금 당신을 만나는 건 아니죠?
정말 문제없어 보이는 제임스 표정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제임스의 변치 않는 확고한 자신감을 신뢰한 채 인터넷을 하러 우중심야에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 확고한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는지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운전 중에 시속 70마일(약110㎞)을 넘나들었다.
'오 주님, 설마 지금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아니겠죠?'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절로 눈이 질끈 감긴다. 과연 이 때만큼이나 절절하게 마음 속으로 기도가 나오는 때도 없는 것 같다. 10분에 갈 거리를 그는 70마일이라는 실로 아름다운 스릴을 즐기며 약속대로 5분 만에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