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보이는 섬이 사도 주민들이 밭농사를 짓고 땔감과 식수를 가져왔다는 낭도다.김준
고기잡이배를 움직이는 것은 사도사람들에게 금기다. 50여 년 전 태풍으로 조기잡이배가 몽땅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난 후 생긴 일이다. 뱃일을 하고 고기를 잡아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배를 짓지 못하고 그물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섬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욕망이 있다. 그건 농사지을 땅을 갖는 것과 육지로 나가는 일이다. 사실 이 두 욕망은 섬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다른 표현이다. 요즘 농사를 짓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경지정리가 잘된 논에 농사를 짓는 것이 소원이라는 바닷가 노인의 이야기가 그렇다. 아들 딸네 집에 갔다 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네모반듯한 논을 보고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때까지 시선을 고정시키는 나이든 섬사람들의 모습이 그렇다.
사도의 농지는 간난아이 엉덩이만한 낭도의 마늘밭이 전부다. 그곳에 고구마, 보리, 밀농사를 지었다. 땔감을 구할 산이 없어 그곳에서 나무도 해야 했다. 매일 마을 공동 나룻배를 이용해 낭도에서 먹을 물도 가져와야 했다. 해가 뜨면 건너가 해가 질 때 배에 가득 나무를 싣고 왔다. 일 년 농사라고 짓지만 반년도 되지 않아 독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럼 기댈 곳은 조간대의 미역, 김, 청각 등 해초들 뿐이다.
그나마 남의 섬에 비탈 밭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주민들의 뛰어난 고기잡이 기술 때문이었다. 조기잡이가 한창일 때 사도에는 대여섯 척의 조기잡이 배와 삼십여 척의 작은 거룻배들이 있었다. 조기잡이배는 멀리 칠산바다와 연평바다까지 나가 조기를 잡았다.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값을 잘 쳐주는 통영까지 나가 팔았다. 그만큼 뱃길에 익숙했고, 이재에 밝았다.
오죽했으면 인근 섬에서 사도를 '돈섬'이라고 했겠는가. 선조들이 낭도에 작은 산비탈이라도 마련해 두었기에 다행이다.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팔아 마련한 8천여 평의 척박한 땅이 목숨 줄이었다. 돈을 가지고도 땅을 구할 수 없는 사도에 비하면 이게 어딘가.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사공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이 작은 행복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1959년 9월 추석 무렵, 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이 사도를 덮쳤다. 사도 주민들의 생명줄이자 희망이었던 30여 척의 배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학교 옆에 아름답던 숲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많은 주민들도 섬을 떠났다. 더 이상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뱃일을 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청각 뜯어 '쌀'과 바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