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세력의 근현대사관을 읽을 수 있는 서적두레시대
솔로몬이 재판관으로 다시 온다 해도 이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봉합만이 가능할 뿐이다. <근현대사> 교과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4월 혁명 단체와 교과서 포럼 간에 합의된 공동성명서는 참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다. 문제의 촉발은 4월 혁명과 5.16군사 쿠데타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고 올바른 역사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만 성명서에 있었다.
그나마 상대가 4월 혁명 단체와 교과서 포럼이었으니 이 나마의 합의도 가능했을 것이다. 노동계와 전경련이 <경제> 교과서를 두고 내용 없는 공동 성명서라도 채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사태의 적당한 봉합은 교육부가 저작자 이름에서 빠지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 보수적 정치학자는 현재 대한민국의 이념대립을 ‘마키아벨리적 순간’으로 표현하였다. 마키아벨리적 순간이란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어느 일방도 정권의 정당성이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채 권력 쟁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즉, 한국 사회는 어느 누구도 이념 대립에 있어서 온전한 승리를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중앙일보 칼럼에서는 이번 2007년 대선이 이에 대한 승패를 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오산이다. 마치 진보세력이 노무현의 집권으로 완전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으로 착각한 것만큼의 동일한 계산착오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한 번의 대통령 선거로 모든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단일한 사회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중 특히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집중 공격을 받았는데, 현재 이 교과서의 채택률은 전체 고등학교 중 50%에 육박한다. 이 교과서를 채택한 역사 선생들의 성향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권을 바꿔 교육 내용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은 다시 독재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나왔던 반론이기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문제가 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참여정부 들어 본격 채택되기 시작했지만, 이 교과서 시안이 확정된 것은 1997년으로 김영삼 정부 때 일이다. 다시 말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집권당이던 시절 열심히 연구하고 제작한 교과서 시안에 대해 보수 세력이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전경련 <경제> 교과서는 참여정부의 ‘교육부’와 공동으로 제작하였으니, 이쯤 되면 보수 세력에게는 아군과 적군도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사라지고 적과 아군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 탈근대 사회의 한 특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탈근대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은 아주 난망한 상황이다.
몇 년 안에 전면적인 교과서 개정이 있을 것이다.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전면적인 대회전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판도를 보건데, 몇 년 내에 진보와 보수, 어느 세력도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헌법에 대하여 언급하자. 여기까지 읽어 온 사람이라면 교과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늘을 있게 한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자, 오늘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해결책의 문제이다.
헌법은 교과서보다 더한 국민 생활의 근간이 되는 규범이다. 얼마 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에 대한 원포인트 개헌이라는 헌법 개정을 제안한 바 있다. 정략적 해석을 배제하고 원포인트 개헌이라는 형식에만 집중하자면,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세력 균점이라는 사회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개헌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진보세력 내부에서는 토지공개념이나 생태적 문제, 혹은 통일 시까지 영토 문제 등의 진보적 개념을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진보세력에게는 진보적 내용을 헌법에 강제할만한 사회적 힘이 없다.
물론 이는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다. 헌법 개정을 한다면 보수 세력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틀을 헌법에 확실히 규정하고, 1987년의 시대 분위기에 어쩔 수 없거나 혹은 몰라서 받아들인 진보적인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보수 세력의 전략은 일절 개헌 논의에 말려들지 않고 정권 교체 이후에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지만, 보수 세력도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의 주기 조정과 같은 극히 기능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헌법의 내용을 두고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보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다 한들 진보세력의 동의 없이는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다.
헌법을 두고 내용적인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은 마치 한국 사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야 교육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개 전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헌법은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해석에 대한 강제력을 둘러싼, 그야말로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벌이는 일국적 차원의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의 문제이며, 또한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는 미래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헌법으로 향한다면 준영구적인 해석 강제력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혁명과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과정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대통령 선거와 같은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극단적인 대립만이 이어져 왔다. <근현대사> 교과서 심포지엄과 같은 강제력을 수반한 합의 과정이 노사문제부터 국회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용이 되었다.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새로운 관행과 질서로 해결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하여 교과서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해석 투쟁은 교과서를 두고 진보와 보수 양측 사이에서 지루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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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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