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빛과 어선들의 집어등 불빛박상건
정상에 우뚝 선 우도등대는 우도 앞바다와 먼바다를 오고 가는 선박의 90%를 차지하는 어선과 부산과 여수, 일본과 중국 등지를 오가는 10%의 여객선과 화물선의 뱃길을 365일 비추고 서 있다.
등대에서 바라보는 대한해협 쪽의 바다는 집어등이 반짝이며 멸치와 고등어를 잡는 어선들의 풍경으로 이채롭다. 또 밤하늘에 네 줄기 불빛으로 수놓으며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모습도 이국적이다.
해안가 가로등 불빛과 어촌의 야경이 어우러지는 우도의 전경은 가히 장관이다. 이는 우도 제4경에 속한다. 봄이면 우도등대 아래로는 노란 유채 물결이 드넓게 출렁이기도 한다.
우도등대는 그렇게 밤마다 20초에 한 번씩 불빛을 반짝인다. 이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20마일(37km).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안개가 자욱한 날은 에어사이렌으로 52초마다 두 번씩 소리를 울린다. 그렇게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이 소리를 듣고 위치와 항해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소리가 들리는 거리는 5마일(9km)에 이른다.
30년 세월 외딴 섬에서 보낸 등대에 바친 사랑
우도등대 소장 이송균씨. 등대지기 생활 어언 30년째이다. 그이는 완도군 소안도 섬에서 태어나 목포공고 건축과를 나왔다. 천상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공고에서 배운 건축기계 기술은 운명적으로 그이를 등대의 길을 걷게 했다. 등대를 고치거나 증축하는 일, 새 기술을 만들어내는 일은 모두 그이의 몫이었다.
첫 딸의 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최남단 마라도 등대지기로 근무했던 그이. 전기가 귀하던 시절, 도면을 직접 그려가며 풍력발전기를 설계했다. 사비를 털어 작업을 하면서 빚도 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내는 운명에도 없는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또 아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양동이를 들고 말똥과 마른 나뭇가지를 줍는 일이었다. 그것은 외딴 섬에서 아랫목을 지필 수 있는 유일한 땔감이었다.
박봉의 등대지기로 사는 일은 표현할 수 없이 힘든 일었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만든 풍력발전기 프로펠러에 막내둥이 얼굴이 5㎝가량 찢긴 일이었다. 어린 딸을 보듬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나가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했다. 아픔의 흔적은 딸의 얼굴에서도 그이의 가슴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그 딸이 시집갈 때 그 흔적을 보고 다시금 속 울음을 울었다.
등대가 돌아가는 섬에 파도만 우는 것이 아니다. 그 파도처럼 사는 영원한 등대지기 이송균 소장은 또 한 번의 울음을 울었는데, 95년 장인이 세상을 뜰 때였다. 장인은 등대 공사를 하면서 사비를 들이고도 모자라 고민할 때 기꺼이 당시의 거금 50만원을 주었던 분이다.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한 채 고생만 시킨 아내와 50만원 이상의 마음의 빚까지 남아 있는 홀연히 떠나버린 장인을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단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일생은 조건 없는 헌신에 있다. 수많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은 마라도 앞바다에서 표류하는 어선 성진호를 구한 일이다. 등대원들은 엔진 고장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연료가 바닥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기름이 귀하던 시절에 등대에만 석유가 보관돼 있었다. 그이는 등대에 있는 석유를 전달하고 가파도로 귀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털어 등대 예산을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