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선사 글씨이정근
김일엽이 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 의복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라는 계몽성 글에, 요샛말로 표현하면 딴지를 걸고 동성인 여자를 형(兄)이라 칭하는 나혜석의 발칙한 칼럼이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였다.
물론 동아일보가 당대의 신여성 두 사람의 논쟁을 유도하여 구독 부수를 올리려는 저의도 있었지만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자존심이라면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원주는 김일엽의 본명이다.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가 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일엽은 진남포 삼숭 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일본 닛산학교로 유학 간 신세대 여성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일본 유학시절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 이혼한 김일엽은 일본 명문가 출신 오따 세이죠와 열애에 빠져 아들 김태신을 낳아 오따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그 후 친구 유덕의 애인이었던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과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즈음 불교에 서서히 심취하던 김일엽은 독일 부르크스 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성욱 박사의 불교논리에 매료됨은 물론 인간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으나 백성욱이 속세를 털고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자 불교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일념으로 재가승 하윤실과 동거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