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넋 위로한다더니..."
약속 저버린 동구청장

500여명 빗줄기 속 산내학살 위령제 갖고 '특별법 제정' 촉구

등록 2004.07.04 17:42수정 2004.07.0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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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희생자 유가족들이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산내 희생자 유가족들이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심규상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에 관한 법률안’이 의원발의에 의해 17대 국회 첫 법안으로 상정된 이후 첫 희생자 위령제가 대전역 광장에서 열렸다.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희생자위령제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원회)는 4일 오전 10시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제5차 대전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열고 조속한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관련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김원웅 의원(대전 대덕구)을 비롯 선병렬(동구), 권선택(중구), 구논회(서구을), 이상민(유성구), 강창일 의원(제주) 등 6명의 의원이 참여해 관련 법안 제정에 대한 당위성과 의지를 밝혔다.

유가족들은 네 차례 위령제가 열리는 동안 김원웅 의원만이 참석해오다 이날 의원들이 대거 참여하자 17대 국회구성의 변화를 실감하며 법안 제정 등에 낙관적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달 16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시급한 다른 일정이 없는 한 꼭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던 박병호 동구청장은 이날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날 위령제 사회를 맡은 김제선 참여자치연대 사무처장은 “당초 학살터가 있는 관할 박병호 동구청장께서 참석해 추도의 말씀을 해 주시기로 약속했으나 아무런 연락 없이 참석하지 않았다”며 “공직에 계신 분이 유가족들의 기대와 약속을 쉽게 저버린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제주도지사와 대전시의회 의장이 각각 조문과 조화를 보내왔다.

김원웅 의원 "'대한민국' 부르기 조차 부끄러운 국회의원"
강창일 의원 "대한민국은 야만의 땅"



이날 위령제에는 지역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17대 국회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유가족들의 법 제정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지역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17대 국회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유가족들의 법 제정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심규상
김원웅 의원은 추념사를 통해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군인이 국민이 세금으로 만든 무기로 국민을 학살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냐”며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부르기 조차 부끄럽고,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 반세기 동안 이를 해결하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조차도 진상규명을 못하는 대한민국은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진상규명 법안이 통과되도록 해 유가족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고인들을 전쟁과 살육이 없는 곳에서 고이 쉬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강창일 의원도 “수천여 명의 민간인 주검을 놓고도 침묵하는 대한민국은 분명 야만의 땅”이라며 “대한민국을 문명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민간인 희생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야말로 4.3 항쟁을 완결시키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산내희생자대전유가족 이광재 대표는 “학살터를 나뒹구는 유골이나마 수습해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바람이 정부와 자치단체의 무관심으로 여전히 실현되고 있지 않다”며 “관련법을 조속히 제정해 유가족들의 기대가 꺾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군경에 의해 죽은 사람은 유골 방치해도 되나?"

참석자들은 이날 채택한 결의문을 통해 같은 시기 대전형무소에서 벌어진 북한군에 의한 희생사건을 언급하며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위해 더 이상 주검을 놓고 색깔이나 이념을 말해서는 안된다”며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에 따라 주검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는 광란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밝혔다.

눈물 흘리는 산내 희생자 유가족
눈물 흘리는 산내 희생자 유가족심규상
이날 행사는 극단 우금치의 위령공연에 이어 참석자들이 흰 국화를 희생자 영전에 헌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태풍 ‘민들레'의 영향으로 내내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산내 대전유족회를 비롯 여수순천 유족회, 제주 4.3사건 대전희생자 유족회, 대전지역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은 이에 아랑곳없이 묵묵히 행사를 진행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내학살터는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제주 4.3 관련자 등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과 대전충남 지역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등이 희생된 것을 비롯해 최소 3000여명에서 최대 7000여명이 집단학살된 후 암매장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위령제는 당초 희생자 학살터 현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현장 인근에 위치한 교회측과의 갈등으로 행사를 며칠 앞두고 대전역 광장으로 변경해 치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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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여동생과 두 딸 ’
산내에서 오빠 잃은 신순란씨

▲ 산내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광용씨의 여동생 신순란씨(69)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신순란(여·69)씨는 행사장에 자작시를 내걸고 주최 측에 희생자 명단만이라도 확인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해 참석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신씨에 따르면 1949년 어느 날 총을 든 사람들이 집(충남 공주시 의당면)으로 몰려와 큰 오빠인 신광용(당시 27세)씨를 끌고 갔다. 총을 든 사람들은 이를 항의하는 신씨의 아버지에게 까지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이후 큰 오빠는 대전형무소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현재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신씨는 이후 “부모님께서 이 일로 속을 태우다 돌아가셨고 큰 오빠가 남겨놓은 두 딸(당시 6살, 2살)마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며 통한의 세월을 살아 왔다”고 말했다.

신 씨는 이날 신광용씨의 두 딸과 함께 위령제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 속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수십 년을 숨죽이며 살아왔다”며 “산내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명단이라도 찾아 달라”고 애원했다.

다음은 “평생 글이라고는 오빠를 그리며 쓴 글이 전부”라는 신 씨가 이날 천에 새겨 행사장에 내건 두 편의 자작시다.

답답한 사연

떠나가신 분들이시여/ 가실 때 얼마나 우셨나요/ 부모님은 불러 보셨나요/ 그것마저 두려워서 못하셨나요/ 억울함에 복받치어 못하셨나요/ 이왕에 가실 바에 힘껏 외쳐나 보시지../

어느 곳에 계신지/ 꿈에라도 일러주시지/ 답답함을 못이겨 쓰고 있네요/ 이왕에 가셨으니 편히 쉬소서/ 이 목숨 다 할때까지 찾을 겁니다/
-오빠 신성호(광용)를 부르며-

눈물의 사연

산 이여 말해다오/ 많은 분들 가시는 것 보고 만 있었는가/ 너무 무심하지 않은가/

낮이었을까/ 밤이었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골령골 산아 / 너는 알고 있지 않는가/말해다오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을/ 하늘도 땅도 산도 말해주지 않네 /

오십년 넘어서야 이 자리에 왔답니다/ 얼마나 기다렸어요/ 남아 있는 우리도 /답답해서 외쳐봅니다/

영혼이 있다면 힘차고 당당한 새 되어/ 온 천지를 날아 보소서/ 새 장에 갇힌 새는 두 번 다시 되지 마소서/ 뼈를 못 찾을 바엔 이름 석자라도 찾고 싶네요/

모든 분들이여/ 이왕에 가셨으니서러워 마시고 편히 눈감으소서/
-오빠 신성호(광용)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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