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한상언
- 어느 강연에서 '제 연극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쓰듯 연극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시를 쓰듯 연극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
"시적(詩的)이라는 것은 꼭 글로 쓴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생활하고, 밥 먹고, 결혼하고 하는 이런 현실적인 부분을 산문적이라고 보았을 때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이나 자신만의 꿈과 같은 현실이 아닌 세계, 바꾸어 말하면 한 개인이 열망하는 꿈꾸는 세계가 바로 시적인 세계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결국 현실을 이야기하기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꿈을 제공하는 그러한 매체라 생각한다. 이것은 연극이건, 영화이건, 문학이건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의 시를 쓰듯 연극을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현실만 가지고 살수 없다. 꿈을 먹고살아야 한다. 그 꿈이 바로 시(詩)이고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 연극을 하기 위해 연극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 두고 13년이 지난 후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을 다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 생활은 단순 반복되기 때문에 따분하다. 단순 반복되는 일상적인 생활이 싫었다. 연극은 한 편, 한 편 할 때마다 인생이 바뀐다. 내가 만약에 백 편의 연극을 하면 백 사람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극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13년이라는 기간동안 온갖 직장을 다 다녔다. 마지막 직장이 신문기자였다. 직장을 한 열번 이상 옮겨 다니면서 생각한 끝에 난 도저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서른 다섯 살에 연극을 다시 시작했다."
- 이윤택을 이야기 할 때 '연희단 거리패', '우리극 연구소', '밀양 연극촌' 이 세 가지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특히, '연희단 거리패'는 부산에서 연극을 시작했을 때부터 같이 해왔다. 이윤택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연희단 거리패'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국 전통 연극은 극이라 하지 않고 연희라고 한다. 그래서 '극단'이라고 하지 않고 '연희단'이라고 했다. '거리패'라는 것은 영어로 하면 '스트리트 씨어터'(street theatre)이다. 길거리에서 하는 연극을 말한다. 제가 꿈꿨던 것이 유랑극단이다. 어떤 극장이나 제도에 묶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그러한 극단이다. 그래서 이름을 '연희단 거리패'라고 했다.
단원들도 연극을 전공한 그런 사람보다는 연극은 굉장히 하고 싶은데 연극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대학극회 출신 사람들이라든지, 아니면 승려라든지, 수녀라든지 이런 연극을 가까이 접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극단을 만들었고 극단을 운영 방식도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하는 대단히 강력한 연극 집단이다. 결국은 이상주의 연극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극단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가족을 떠나서, 집을 떠나서 같이 돌아다니면서 연극하는 그러한 이상적인 유랑극단 형태가 '연희단 거리패'이다.
연희단거리패가 제일 처음 생긴 곳이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이다. 지금도 있다. 서울의 '우리극 연구소'를 세우고 밀양에 '밀양 연극촌'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극단 단원들은 부산에 가면 '가마골 소극장', 밀양에 가면 '밀양 연극촌', 서울에 가면 '우리극 연구소',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 1988년 '연희단 거리패'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연희단 거리패'가 부산의 대표적 극단이었는데 지역에서 연극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온 이유가 있다면.
"지역문화라는 것이 너무나 폐쇄적이다. 지역문화인들 스스로가 그 지역 속에 갇혀 있으려고 한다. 또 중앙문화라고 불리는 서울 사람들은 지역을 무시한다. 이것은 대단한 불평등 구조이다.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화가 이렇게 불평등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연극을 만들어도 지역연극은 무시하고 아무리 연극을 날림으로 만들어도 서울연극은 좋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공연을 가자고 했다.
그때 후배 시인인 죽은 기형도 시인이 '이윤택 서울입성'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서울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그런 분위기였다. 서울공연을 88년도 <산씻김>, 89년 <시민 K>, 90년 <오구> 이렇게 삼연타석 홈런을 쳤다.
이러니까 서울 분들은 '왜 지방에서 연극 만들지 왜 서울 오느냐' 하고 나는 '평론가나, 언론매체나, 특히 관객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은 시장이다. 너희들만의 시장이 아니고 모든 대한민국 문화인들이 다 사용할 수 있는 유통시장인데 내가 여기에 연극을 팔러 왔는데 왜 너희들이 텃세 부리냐' 했다. 부산지역에서는 또 '이윤택이가 출세하려고 서울 갔다'고 했다. 이러한 양쪽의 잘못된 편견 속에서 우리 극단이 끊임없이 서울공연을 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서울에 안주하지 않고 고향인 부산에 '가마골 소극장', 밀양에 연극촌을 세우며 그렇게 18년 동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