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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다음은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가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주>
▲ 과연 좋은 개방은 가능할까? 한미FTA가 급물살을 타면서 한국 정부 및 보수세력와 진보세력이 양극화되고 있다. 개방 문제는 진보개혁세력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 사회에 '좋은 개방'은 가능한가

필자는 작년 말까지 '좋은 개방'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기회가 되는 대로 조금씩 의견을 말해 왔다. 요지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계화는 일종의 추세이고 상수적인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반드시 확고부동한 신자유주의적 실체인 것은 아니고 개방이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전략은 경제적 양극화, 사회적 비용, 민주적 제도의 약화를 초래하지만, 세계화와 개방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정책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의 환경 속에서는 개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함으로써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길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 이일영 외, '한국형 신진보주의 이념: 개방-혁신-연대의 한반도경제', <동향과 전망> 64, 2005)

이러한 논지에 대해 '개방적 진보주의'로 보는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또 한편에서는 비판적인 논평도 없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주요한 구분선은, 분배와 평등성을 중시하느냐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느냐 하는 것이므로, 개방을 말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진보나 보수에 관한 기존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개념들이 역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고 나아가 이를 재구성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경제적 몫을 증대하고 옹호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그에 이르는 경로와 수단은 '개방 반대'가 아니라 '좋은 개방'을 구체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개국-쇄국'론의 프레임

그러나 올해 들어 '좋은 개방'을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다. 한미FTA 둘러싼 대립이 격렬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6월 제기한 대연정 논의가 실패하면서 9월쯤 한미FTA 추진을 결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미국이 제시한 선결과제를 풀어줬고, 올해 2월 초 공청회 등 절차를 무시하면서 협상을 공식 출범했다.

이렇게 되니 운동세력은 '폭주'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면서 한미FTA를 추진하는 정부 및 보수 세력과 반대운동에 나선 진보세력 사이에 논의가 양극화됐다. 추진 세력은 '개국'이냐 '쇄국'이냐 하는 프레임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운동 세력은 그간 헌신적으로 한미FTA의 졸속 추진에 제동을 걸어 왔다. 지금까지는 잘 싸워 왔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한미FTA 협상이 진행되면서 정부가 생산하는 정보도 증가하고 있다.

평균적인 의식을 가진 국민의 경우, 개방과 FTA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국민 대다수는 국제협상에서 과도하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협상이 진행될수록, '한미FTA=을사늑약'론은 '개국-쇄국'론의 프레임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

보다 근본적으로 개방 문제는 진보개혁세력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국제적 이동이 일상사가 된 마당에 운동세력이 내놓는 논변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진정 개방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것인가? 개방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개방을 생각하고 있는가? 실현될 수 있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서야 한다. 이제 '좋은 개방'에 대해 잘 말해야 할 시점이다.

한미FTA 반대는 '반미' 운동인가

▲ 일각에서는 한미FTA 반대운동을 '반미'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체제 구상 없이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진은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한미 FTA저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폐기를 위한 2006 자주평화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성조기를 찢는 장면.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경제적 개방이란 미국의 패권이 관철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해 왔다. 그래서 한미FTA 반대 운동 일각에서는 이를 '반미 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예를 들면, 한미FTA를 한국을 대북 선제공격과 중국 공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미동맹을 재편하려는 지렛대로 쓰고 있다는 인식이다. 이에 따르면, 결국 미국을 제외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동북아 평화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한국은 한반도 주변국과 우호를 유지하고 평화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비동맹중립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보는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대 중국 전략이 반드시 확정·고정된 것으로 보는 것은 시기상조다. 미국과 중국은 경쟁적인 측면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보완적 관계의 측면도 많다. 중국의 힘을 감안할 때, 전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아에서도 중국이 미국을 적대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아직 아니다.

당분간 미국을 제외한 세계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미국의 지위가 점점 하락하고 있고 동북아와 중국의 지위가 올라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2005년에만 805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달러본위제와 동북아의 달러 구매력이다.

이러한 교환체제는 비대칭적이기는 하지만, 꼭 군사적·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동북아에서는 미국을 빼고서는 완결된 시장분업구조가 형성되지 않고 있으므로, 현 상태에서는 미국을 뺀 동북아는 존재할 수 없다. 중국에게 미국만한 상품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비대칭적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과잉투자와 거품성장을 조정해야 하고, 자원과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쓰는 문제도 심각하며, 석유에 대한 의존이 너무 커지고 있다. 빈부격차, 지역격차, 환경 및 질병, 물 부족, 비민주적 정치제도 등도 계속 회피할 수는 없는 문제다.

부당한 미국의 요구에 대해서는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체제 구상 없이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국이 빠진 세계체제와 동북아는 당분간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동북아 역내 국가들과 무역·투자를 확대하고 이로부터 동아시아 경제통합으로 발전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개방 '이념투쟁'은 그만... 개방 따른 보상체계 마련해야

한미FTA의 협상 결과에 따라 한국의 농업과 서비스업, 그리고 제조업의 상당 부분은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한국의 모든 경제 주체들이 한미FTA의 패자(loser)가 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는 분명 승자(winner)가 있을 것이며 그들이 얻는 이익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승자들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개방과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로 본질을 규정해 반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난 20여 년간 세계경제의 급속한 변화의 패러다임을 주도한 것은 '세계화'다. 세계경제에서 생산망과 해외직접투자가 지역적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한국, 중국 연안 지역은 급속히 공업화를 달성했다.

세계화는 동북아의 경제적 비중과 상호 연결성을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제 과거처럼 국경과 국민을 절대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개방 지지와 개방 반대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현실에서 벗어난 이념투쟁이 되고 만다.

국민 대다수의 인식은 경제학에서의 경제이론의 원리가 말해주는 쪽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많다. 비교우위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역의 자유화는 교환의 이익과 전문화의 이익으로 사회적 후생을 증대시킬 수 있다. 단, 무역에 따른 재분배 효과를 보상해야 후생 증대를 확언할 수 있다."

반드시 한미FTA가 아니더라도 개방과 자유화는 특화와 전문화에 따른 구조조정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구조조정에 따라 발생하는 역분배 효과를 교정하는 재분배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방이 없으면 성장도 발전도 없다. 관건은 개방과 함께 보상체계를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수용 가능한 점진적인 개방으로

▲ 한미FTA의 협상 결과에 따라 한국의 농업과 서비스업, 그리고 제조업의 상당 부분은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있다. 관건은 우리 사회가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진은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FTA협정 의견청취 토론회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종훈 한미FTA협정 한국측 수석대표.
ⓒ 오마이뉴스 이종호
개방과 관련해 첫 번째로 상기할 점은, 개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 시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개방과 혁신이 동행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이 얼마나 빠른가 하는 것은 한 사회의 '생명력'과 관련되어 있다. 혁신능력이 강한 '젊은 경제'는 빠른 개방 속도를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개방이 국내혁신과 연계 없이 무리하게 진행되면, 개방의 성과보다는 부작용만 쏟아낸다.

현재 WTO(세계무역기구)의 다자 협상이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한미FTA의 국내 부담은 훨씬 더 커졌다. 그러므로 이행기간과 포괄범위를 조정하여 국내개혁이 개방 속도를 따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협상이 진행될수록 경제적 득실을 구체적으로 따지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한미간 협상 역량이 비대칭적이기는 해도, 농업·서비스업의 예외조치 없는 시장개방, 투자시장의 완전한 자유화로 협상이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미FTA의 내용을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과 범위로 낮추고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 향후 한국의 발전모델, 성장과 고용의 원천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거대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서비스산업 수준으로 보아 무리한 개방은 상당한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개방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국내 서비스산업의 발전 방안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경제의 서비스화는 한국경제의 선진화와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제이다. 또 서비스산업의 성장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미국 모델을 추종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서비스산업에서,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제 막 시작된 논의이지만, 한국의 서비스산업 발전전략은 미국의 서비스업 표준을 학습-추격하는 한편으로,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 기반하고 그것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한 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 실정에 맞는 복지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방에 대한 보상은 복지동맹은 특정 집단에 보상을 하는 방식보다는 보편적 제도 형태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야 재분배효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혁신능력을 저해하지도 않는다.

현재 한국은 분배를 개선하기 위한 재정의 크기가 절대적·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공공영역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일정 영역에 복지 거점을 구축하는 실험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이를 확산하는 방식이 좋다.

복지화 전략을 잘 추진하기 위해 짚어야 할 것은, 중도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과거 진보적인 정부들이 재분배적 정책 체제를 형성했으나, 투표자들이 양극으로 분해되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주도적으로 관철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스웨덴의 경우 노동운동의 역할이 컸지만, 가톨릭, 보수주의, 자유주의 세력의 영향을 강조하는 논의도 많다. 개방의 위기는, 확대된 복지동맹을 구축하는 데 기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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