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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다음은 조희연 교수가 보내온 글의 요약본입니다. <편집자주>
현재 민주진보세력은 새로운 도전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던 민주진보세력에게 다양한 위기적 도전들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정부 10년이 이제 보수 세력에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를 나는 '전환적 위기'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위기란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바처럼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한 지적 혼란과 삶의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환적 위기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위와 같은 상황 인식 위에서 전환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고투(苦鬪) 지점들 중 두 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통치엘리트가 된 중도리버럴이 위기의 주범

첫째,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통치세력이 됨으로써 일반 국민에게 '통치' 세력으로 투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조건 변화에 상응하는 미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개혁의제 실현의 당위성만 인식했지 그 헤게모니적 실천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헤게모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집단이 일정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 타 집단, 나아가 대중들에게 가지는 지적·인식적·도덕적·문화적 지도력을 의미한다.

반독재민주세력은 독재의 전 기간에 걸쳐 특히 80년대 말~90년 초반까지의 시기에 통치에 저항하는 장외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 정부의 수립으로 혹은 일반 국민이 보기에는 92년 김영삼 정부 수립에서부터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국가권력의 담당세력, 즉 통치세력이 된 것이다.

▲ 2002년 대선에서 극적인 역전드라마를 연출했던 노무현 대통령. 사진은 2002년 대통령선거 유세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국민정부나 참여정부 세력을 '중도(개혁)자유주의 정치세력' 혹은 '중도 리버럴(liberal)'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사회적 세력으로 국가권력에 대결하면서 투쟁하다가 자신들이 통치세력이 되어 직접적으로 위로부터(자신들의 요구하는 의제를) 집행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현재의 전환적 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이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제도권화' 과정이다. 나는 통치엘리트가 된, 그러면서 과거의 반독재민주세력을 계승하는 제도권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문제점이 현재 위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민주정부 하에서 진보의 외연이 확장되지 못한 이유

이 문제를 참여정부 하에서 민주세력 혹은 진보세력의 '외연'이 얼마나 확장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생각해보자.

박정희 시대에 보수 세력은 자신의 집권을 통해서 독재적 방식으로 외연을 확장했다. 그 결과 지금도 친박정희 세력이 다양한 사회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보수 세력은 국가권력이라는 '이점'을 통해서 자신의 외연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독재민주세력 출신 통치세력은 과연 얼마나 '보수와 개혁진보의 경계'를 허물면서 보수를 획득했는가. 자신의 헤게모니 하에서 과연 얼마나 보수의 분화를 촉진하면서 보수의 일부를 포섭했는가.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국가권력 담당자가 된 이상, 독재 하에서 구축된 보수의 사회적 기반 혹은 조직적 기반을 해체시키면서, 현재 중앙정치의 민주화 수준만큼 보수의 사회적 기반도 민주화시키는 문제를 고민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개혁적·진보적 방식의 '경계 허물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경계 지키기의 정치'에 한정됐을 뿐,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한 '경계 횡단의 정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중도자유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급진민주세력도 직면하는 문제이다. 많은 경우 진보는 경계 확인이나 경계 지키기의 차원에 머무르고 '경계 횡단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을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형태이지만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나 장외의 급진진보집단 모두가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통해서 외연을 확대하고 헤게모니를 확장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동일한 인식태도(mentality)에서 연유한다.

급진진보세력과 통치엘리트는 분열하라

이런 전제 위에서, 나는 거리에서 싸우는 급진진보세력과 통치세력이 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 명확히 분열·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미 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인식태도에서는 상당한 동일성이 존재하고 있다. 서로의 '일체감'을 확인하기보다는 서로 '대상화'하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달라져야 한다. 이러한 분화는 급진진보가 중도자유주의와 더욱 구별되는 방식으로 급진적으로 행위하고 사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문제는 최근의 전시작전권 통제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전시작전권이라는 의제의 제시와 실현이라는 결과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차기 정권이 바뀌면 전시작전권 이양 시기는 당장 조정될 수 있는 문제이다. 전시작전권 환수가 중요하지, 2009년인지 2012년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일부 국민이 친미적 인식을 강하게 갖고있는 현실을 고려해 그것이 보수에 의해 동원되지 않도록 하면서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목표를 탄력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전시작전권과 관련해 전직 장성들이 항의성명서를 낸 데 대하여 현직 국방부 장관이 반박성명을 하고 논쟁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싶다. 오히려 전시작전권 환수의 추진의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간지대나 보수진영의 인사들을 논의 속에 끌어들이면서 일정 부분까지 포괄하고 동의하는 타협적 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자신의 주장을 강변함으로써 오히려 보수가 이를 국민적 쟁점으로 동원하게 만들고 있다.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관련한 전 국방장관들의 모임이 지난 8월 10일 오전 서울 신천동 향군회관에서 열렸다. 전직 국방장관들은 회의를 마친 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언제라도 좋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결코 이 발언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간 성명서를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는 원숙한 협의 과정을 통해 적대적인 영역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개혁의제가 아니라 개혁의제의 실현과정을 고민하는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의 또 다른 과제다.

나는 반독재민주세력의 일부였던 통치엘리트들의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진보개혁세력 전체의 문제로 되는 현실을 보면서, 오히려 분화되고 분열되고 다른 태도와 행위양식이 나타나야 '부정적인 부메랑' 효과가 최소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부정적인 부메랑 효과를 넘어, 보수의 새로운 활성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막아야 한다. 이러한 분리정립의 사고가 장내와 장외의 민주진보세력 모두(각기 다른 형태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분리정립이 확연히 이뤄져야, 장외의 민주진보세력이 장내 통치엘리트와 분리되는 방향으로 급진적으로 행위하고 사고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일체화된 사고가(특히 시민운동의 경우) 장외의 민주진보세력 내부의 급진성을 역으로 질곡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명확한 분리가 모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포스트-민주화 시대, 사회적 대안부재에서 오는 위기

둘째, 현재 위기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는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대안담론이 민주진보진영 내부에 부재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독재시대와 민주화시대를 거쳐 이른바 '포스트-민주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포스트-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에 내포되어 있던 민주주의적 과제들이 불철저하지만 실현됨으로써 나타나는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에 고통받고 있다.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나 급진진보세력들은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대안을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미래지향적 세력이 아니라 과거지향적('과거청산' 같은 식에 머무르는) 세력으로 되어가고 있다.

80·90년대 민주주의 혹은 민주개혁은 더욱 인간답게 사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풍부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코드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주어진 것'이 되었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존재에게는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미래 비전을 둘러싸고 계급적으로 상층의 이해관계에 투철하게 선 시장근본주의적인 '신보수적 프로젝트'(예컨대 삼성의 '매력있는 한국')가 있다. 바로 이러한 보수적 프로젝트에 대응하는 민주진보적인 대안 프로젝트가 부재하다는 점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나는 첫째의 논점의 연장선상에서, 통치엘리트로서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중도자유주의적 프로젝트와 중장기적인 미래 비전을 담는 급진 진보적 프로젝트가 분립 정립되는 식으로 다양하게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자유주의적 프로젝트는 보수세력과 구별되는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상쇄하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급진진보세력 프로젝트는 우리 사회의 의식적 진보화를 촉진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자체를 쟁점화하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 확대재생산 되는 전 지구적 자본질서를 구조적으로 재편하는 대안적 프로젝트다.

이런 점에서 사실 단일한 진보는 없다. 다원적인 진보가 대중에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시대 사회적 국가 모델은?

▲ 한미FTA 저지를 위한 범국민집회. 7월12일 서울시청 앞 광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시대의 '사회적 국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보수가 추동하는 친자본적인 경쟁 지향적 국가에 대응하는 '사회적 완충국가' 모델로 가야 한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와 현재의 보수 세력이 추구하는 '취약한 시장과 자본을 지원하는' 국가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완충하는 사회적 국가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국가모델의 개발은 중도자유주의세력과 급진진보 모두에게 과제다. 전후 일국적인 포디즘적 조건 위에서 사회복지국가가 정립되었다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조건 속에서 이는 해체되어가고 있다.

반세계화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새로운 고양 속에서 신자유주의시대의 신개발국가모델이나 경쟁 지향적 국가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공적 기능이 강화된 사회적 국가모델이 모색되어야 한다.

박정희 시대를 통하여 강화된 경제적 기득권층과 자본가층은 국가의 사회성을 견제하고 지속적으로 친자본적 국가로 기능하도록 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은 이러한 국가의 탈(脫)사회화의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압도적인 흐름은 대안의 지형 자체를 크게 제약하는 셈이다.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신자유주의시대의 사회적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입장이 필요하다. 중도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도, 또한 급진진보세력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양자는 다른 내용을 담지할 것이다.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에게는 현 단계 국가운영의 과제가 현실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보수적 저항들을 뚫고 헤게모니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적 고민이 추가되어야 한다.

물론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동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회적 국가를 향한 노력을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급진진보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이 신자유주의로 경도되어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를 견인하고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해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조희연 교수는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이기도 합니다. 그의 홈페이지는 http://dnsm.skhu.ac.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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