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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최측에서 마련한 슬라이드. 한국을 시민기자의 나라로 규정했다.
ⓒ 홍은택

너무 놀랄 것 같은데 또 출장 얘기다. 이번에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

대충 헤맨 것처럼 하다가 오마이뉴스를 잘 홍보하고 왔다, 그런 얘기 또 하려는 거지? 그렇게들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테니 나로서도 쓰기 참 어려운 글이다. 이번에는 항공료가 아니라 호텔비 계산이 틀려서 애를 먹었다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고.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있는 시스코사 국제회의장에는 미국에서 내로라 하는 인터넷 관련 비정부단체(NGO)들이 집결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없는 흐름인데 미국에서는 빈부 격차의 새로운 원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기술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대중에 보급하려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복잡한 기술 코드를 공개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오픈 소스(open source) 운동에서부터 100달러짜리 노트북 컴퓨터의 개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이번 행사는 십수년전부터 이 운동을 전개해온 테크숩(Techsoup.org)이 주최했다. 테크숩은 말 그대로 하면 기술국이다. 큰 가마솥에 수프를 끓여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자로 떠주듯이 기술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공짜로 기술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다. 컴퓨멘터(CompuMentor.org)라는 사이트도 운영하면서 컴퓨터에 대한 교육도 하고 있다. 회의 마지막 날 오후는 비디오 블로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법에서부터 사이트 디자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기부금 모금에 이르기까지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교육하는데 바쳐졌다.

국제회의의 이름도 잘 지은 것 같다. 네트스퀘어드 컨퍼런스(NetSquared Conference). 네트스퀘어드는 인터넷으로 평평해진다는, 나아가서 평등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여기에는 '드레스 코드' 그런 것도 없다. 그러니 3월에 온라인발행인협회(OPA)에서 주최한 세계포럼에서처럼 목없는 흰 양말을 신고간들, 아니 반바지를 입고간들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는 시민 저널리즘 전체 회의에서 시민 저널리즘의 대부 또는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댄 길모어(Dan Gilmore)와 하버드법대 버크먼 센터 부설 글로벌 보이스 온라인의 공동창업자인 이선 주커먼(Ethan Zuckermann)과 함께 주제 발표를 했다.

종이 한장으로 시작된 정치 폭풍

▲ 온라인 청원서 한장으로 300만명의 회원을 가진 시민단체를 키운 조안 블레이즈. 내게는 영웅이다.
ⓒ 홍은택
내 얘기를 하기 앞서 나는 이 회의에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조안 블레이즈(Joan Blades).

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탄핵 정국 당시 "그만하고 시급한 나랏일을 논의해라, 마" 하는 어조의 단 한 줄짜리 청원서가 제출된다. 영어로 "Move on"이다. 클린턴의 여성 스캔들을 거의 일년 가까이 정치적으로 우려먹는 공화당의 작태에 식상한 시민들이 입소문을 듣고 청원에 서명하기 시작, 삽시간에 50만명이 연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한 줄짜리 청원을 낸 사람이 바로 블레이즈다. 남편 웨스 보이드(Wes Boyd)와 함께 소프트웨어 회사인 버클리 시스템스를 운영하던 블레이즈에게도 이 청원은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던 정치적 진공 상태에 깃털과 같은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지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정치적 폭풍이 몰아쳤다.

그들은 'www.moveon.org'이라는 사이트를 열었다. 98년 9월 22일의 일이다. 온라인으로 청원서명을 받았는데 한두 명 사이트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열흘째에 10만명이 서명했다. 그리고 22일째인 10월 13일에는 하루에만 25만 명이 서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블레이즈 부부는 어느 날 생겨버린 역사의 동력을 서명운동으로 국한시킬 바보가 아니었다. 탄핵을 주도하고 있는 의원들에게 항의전화 20만통(지금부터는 최소한 만 단위다)을 걸게 하고 50만장의 스티커를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서 차에 붙이도록 했다.

공화당이 기어이 탄핵을 강행하자 블레이즈 부부는 캐치프레이즈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로 바꾸어 탄핵에 앞장선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자 몇 개월 만에 1300만달러(약 156억원)의 기부와 70만시간의 자원봉사 서약이 쇄도했다. 시민운동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무브온은 3백만명의 회원이 있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풀뿌리 정치단체가 돼 있다.

클린턴 탄핵 정국 당시 나는 워싱턴에서 다른 회사의 특파원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맨날 똑같은 기사를 읽고 써야 해서 싫증을 내고 있는 차에 무브온의 폭발적 성장에 감동을 먹고 블레이즈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밑져봤자 본전' 식의 인터뷰 시도였는데 답장이 왔다.

블레이즈는 인터뷰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캠페인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서 "인터넷의 힘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블레이즈는 자신의 운동을 '반짝 캠페인(flash campaign)'이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불과 89달러95센트(웹사이트 개설비용)로 1억명과 동시에 교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든 순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반짝 캠페인을 전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7년만의 재회, 이번엔 나란히 연사로

▲ 연단에서 디모크래시 나우(Democracy Now)의 앵커 애미 굿맨과 토론을 벌이는 조안 블레이즈.
ⓒ 홍은택
무브온은 더 이상 반짝 캠페인 단체가 아니다. 여론의 역풍을 맞아가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낙선운동을 벌이는 데 수천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중도노선의 미국 민주당을 좌파로 견인하는 압력단체라는 볼멘소리도 민주당 내에서 나온다.

블레이즈는 생각했던 대로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다만 광대뼈가 솟은 게 선은 조금 굵어보인다. 일요일에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것과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조는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수사학보다는 가식 없는, 친근한 엄마의 목소리다.

그는 이번 강연에서 "우리는 특정한 당파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기 위한 단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유급 출산휴가에 대한 법적인 보장 문제를 꺼냈다.

"세계 168개국이 유급 휴가를 보장하고 있고 조사된 국가들 중 단 4개국이 그렇지 않은데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하는 미국이 이 4개국에 끼어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고치자는 게 특정당파의 문제일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험료를 내는 나라가 유아사망률 세계 37위라는 현실을 놔두고 무슨 이념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발표가 끝나고 연단에 다가갔다. 블레이즈는 당연히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오마이뉴스에 대해서는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TV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불려갔고 우리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이메일 인터뷰에 응해준 것에 감읍한 게 7년 전 일인데 나란히 연사로 초청돼 같은 자리에서 얘기할 수 있다니…(물론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시민기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 이번 주제발표에서는 그 전과 다른 한 가지 뉴스가 있었다.

시민 저널리즘은 검증되지 않은 시민들이 기사를 출고한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기존 언론사들로부터 받곤 한다. 시민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입장에서는 소수의 그룹(신문사)보다는 폭넓은 다수(시민)에서 사안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아는 필자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다중의 생각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여론의 흐름을 더 잘 대변한다고 본다.

신뢰성의 문제는 직업 기자가 오보를 내고 기사를 베낄 위험성의 수준 이상으로 시민 기자에게만 특별히 크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이트 운영자가 편집자를 둬서 확인해 나가야 할 문제로 본다. (사실 한국 언론 상황의 경우, 신뢰성의 문제는 오히려 당파성과 더 관련이 있긴 하지만.)

▲ 남태평양의 외딴 섬 이스터 섬에서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로 활약 중인 마르고트 호투스는 언제나 주제발표할 때마다 먼저 출연해 사람들을 환영한다.
ⓒ Roland Tanglao
5월 30일 연설할 때 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이 서로 기사 링크를 교환하기로 합의한 사실을 발표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현장에서 무선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 컴퓨터를 통해 바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 저널리즘, 특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 시민 저널리즘이 이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신뢰성에 관한 한 미국 언론은 더 까다롭다. 더구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국제 뉴스에 관한 한 가장 권위있는 신문. 이 신문에서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과 기사 링크를 교환하기로 했다는 것은 언론의 미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새롭게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언론사도 결국은 시민 저널리즘의 요소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그리고 이같은 내용을 영국의 역시 권위지인 가디언이 보도함으로써 다시 뉴스 가치를 인정 받은 셈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잇단 언론들의 확인요청에 5월 31일에는 보도자료를 내고 이같은 합의를 공표했다.

지난 3월 초 온라인발행인협회 초청 세계포럼에서 트리뷴 측 인사를 만나 첫 논의를 시작한 이후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주고받은 끝에 석달 만에 성사된 합의니까 사실 좀 뿌듯했다.

세계가 우릴 보고 있다, 간담이 서늘하다

논의 시작 당시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에는 세계 60개국에서 600여명의 시민기자가 등록해 있었다. 석달 뒤인 지금은 91개국, 1000명을 넘어섰다. 이 속도로라면 올해 100개국, 2000명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블레이즈가 경험한 것처럼 인터넷의 가공한 위력으로 그보다 훨씬 더 빠를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는 AP나 로이터 통신처럼 시민들의 관점에서 쓴 기사를 전 세계 언론에 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기자가 한 10만명쯤 있어야 한다. 세계 시민 저널리즘의 10만 양병론이다.

왜 그런 계산이 나오느냐면 AP통신에는 3700명의 기자와 현지 취재인력이 있다. 이들은 언제든 취재 지시가 떨어지면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이다. 우리는 1000명이 있지만 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다. 3700명의 30배쯤 되는 인원이 있어야 안정적이고 다양한 기사 공급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목표가 그렇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양적 성장에 가려 내부에서 문제점이 커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사 출고 건수가 많아질수록 오보나 허위보도 또는 표절 기사를 출고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지금은 세계의 언론 종사자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고무적이지만 간담이 서늘한 일이기도 하다. 이번 출장 얘기는 그래서 스스로 너무 고무되지 말자는 다짐으로 끝내야 할 것 같다.

당분간 출장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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