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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보지 않는 세상은 없다. 지구상에서 경쟁을 원리로 사는 한 불가피한 현실이다. 제한된 수요를 위해 공급을 제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공급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는 경쟁시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수단이다. 문제는 이 평가가 어느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적용되느냐이다.

최근 교육계에선 초등학교의 학력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워 일제고사형식의 평가를 도입하겠다며 시도교육청이 앞다퉈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 2003년' 조사에서도 문제해결력을 포함한 4개 분야에서 세계 1∼4위를 차지하였고, 국제교육성취도평가협회(IEA)가 중학생들의 실력이 2, 3등의 상위권이라고 치켜세우던 기억이 얼마나 지났다고 말인가.

일제고사시험을 보겠다는 발상은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도통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기준이 없어 보이는 어른들의 눈매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의 학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이 있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어디 어른들이 창의력이라는 환경에서 공부했던 적이 있는가. 그러니 답답한 학부모에게 성적순의 자료는 속 시원한 준거일 것이다.

공정택 시울시교육감은 "'학력평가' 같은 한 줄 세우기식의 일제고사는 금지할 것"이라면서도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로 '학업성취도' 시험을 보는 것이 가능하며, 시험시기·횟수·평가방법 등은 학교 자율에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감의 발언을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어떻든 절대적 척도인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평가를 하겠다는 것이니 오히려 생뚱맞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왜 아이들의 능력을 점검하는데 학업성취도식의 시험이 필요한 것인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평가가 초등단계에서 꼭 필요한 이유가 뭘까.

이러한 정책의 이면에는 무엇보다 중앙집중식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발상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집중식 사고의 관점에서는 상급기관에서 말단 학교를 관리하려면 교육과정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앙통제가 심한 우리 나라 교육이 아닌가! 이는 말만 학교 자율이지 교육청의 통제 중심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정신에도 위배된다. 왜 교육은 자기 지역의 특성에 맞게 궁리되지 못하는 것일까. 지역에 맞는 전문성을 고민한다면 일제고사를 통한 능력 척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전문성을 지역의 조건에 맞게 발굴해 낼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적이 아니라 특기가 개발될 수 있는 차원에서 말이다.

또한 이러한 정책 이면에는 서열 중심의 사고를 극복하지 못한 발상도 숨어있다. 초등학교 시기는 다양하게 숨어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키우는 시기이다. 교과 내용의 시험 실력이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성장기 아이에게 공부 아닌 재능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아이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시험이라는 절대적인 수치로 진단한다는 것은 커다란 한계가 있다.

교육과정의 진단을 위한 서술식이 아닌 '학업성취도'는 단계형 평가결과를 수량화한 것이니 말 바꾸기에 불과하다. 수·우·미·양·가 평가방식이나 등수 등은 금지하되 일선학교에서 매우 잘함·잘함·보통·못함·매우 못함 등의 방식으로 선택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도 등급을 매겨 기르겠다는 또 다른 전형일 뿐이다.

게다가 현재의 교사 한 사람이 40여명을 감당하는 교육환경으로는 자칫 윗 돌 빼다가 아랫돌 괴는 꼴이 되기 쉽상이다. 내 아이의 실력을 가늠하고 싶은 심정은 학부모들의 인지상정이다. 부모들의 성적확인 요구야 제기될 수 있는 문제지만 그걸 핑계로 통제에 악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교육계는 성적 밖으로 벗어난 80%의 들러리 학생들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실, 일제고사를 부활하자는 발상은 창의적 사고를 절대적 능력이나 상대적 능력이나 같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내용에 있다. 아이들의 개성과 적성을 키워줄 수 있는 다양한 통로와 내용은 담지 않았으면서 평가가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보다 부차적인 요소에 얽매이는 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전남의 주간 이슈신문 [시민의소리](siminsor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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