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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에 실린 김민웅 목사의 편지
'서프라이즈'에 실린 김민웅 목사의 편지
김민웅 목사님.

목사님의 글을 <서프라이즈>에서 읽고 하루 종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았고, 또한 목사님의 여러 글을 통해 제 삶의 방향을 점검해오던 터라 목사님께서 성경말씀까지 인용하시며 하시고자 했던 이야기에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형으로서 일방적 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옹호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글 어디에서도 평소 목사님께서 보여주셨던 신념과 실천적인 삶에 대한 냉철한 판단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냉전수구세력으로서의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절박한 선택의 하나로 그와 같은 선택을 거부하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서 숙고하고 있다"는 말로 김민석 전의원의 입장을 옹호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냉전세력의 집권을 막아내는 일이 절박한 역사의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회창 대통령보다 더 끔찍한 것은 최악의 선택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협잡과 배신마저 용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사회에서 상식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YS가 용서가 되고,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적 지향성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던 DJP 연합이 용서가 되었기 때문에 이 나라 정치판이 아직도 때에 따라 온갖 철새가 떠돌아다니는 철새 도래지 꼴이 된 것 아닙니까.

제가 이회창의 집권을 끔찍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냉전수구세력이기도 하지만 "하늘이 두쪽 나도 집권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 때문입니다. 하늘이 두쪽 나도 집권을 해야겠기에 총풍이니, 세풍이니, 안풍이니 하는 비리가 우습게 저질러지고, 병풍을 막기 위해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이회창 개인의 방패막이라는 역할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회창의 대안을 내놓겠다는 분들이 하늘이 두쪽 나도 이회창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노무현과 정몽준을 한데 묶으려 하고 있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노무현은 국민경선에 의해 선출된 국민후보이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당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입장입니다. 재벌 출신으로 여론조사 결과 하나를 무기로 선거판에 뛰어든 정몽준과 도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입니까.

이회창만은 안 된다는 '대의'로 인해 배신과 술수가 용서가 된다면 이회창만은 안 된다는 게 과연 대의가 맞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회창만은 안 되기 때문에 노무현과 정몽준이 연대해야 한다면 며칠 전 출마 선언한 장세동 역시 연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노무현과 정몽준의 연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실은 '아우'의 배신을 감싸 안기 위해서) 에스겔서의 성경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과연 성경 말씀이 노무현과 정몽준더러 연대해도 좋다고 증거하고 있는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에스겔서 37장 15절-17절)

유다지파의 이름이 적힌 막대기와 에브라임지파의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모습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발견하신 목사님의 안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는 원래 야곱의 배다른 아들로서 형제지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다 둘 다 바빌론의 노예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 출발은 하나였으며 그들이 믿는 하나님 역시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에브라임 두 지파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에 하나님께서 친히 원래 하나였던 그들을 하나로 다시 묶어주시기 위해 주신 계시입니다.

원래 하나였으며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서로 구분됨 없이 한통속'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서로 간에 차별이 없으며 네가 나이고 내가 곧 너인 상태로 승화하는 것'은 원래 하나였던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노무현과 정몽준이 원래 하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그 두 명의 후보가 동일한 하나님(정치적 지향점)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아니라고 봅니다. 노무현과 정몽준의 차이는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만큼이나 확연합니다. 이번 북핵 문제에 있어서 두 후보의 입장 차이는 누가 봐도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작업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서 그의 아들인 정몽준이 노무현과 함께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열어갈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너무 억지 아닙니까? 정몽준은 스스로 이회창과도 연대가 가능하다고 했던 인물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 부자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법을 묻자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0장 21,22)

노무현이 예수라는 의미가 아니라 뜻을 같이 하려면 함께 하고자 하는 이의 사상과 행동에 온전히 동의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는 결코 '한통속'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몽준이 진정 노무현과 '한통속'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현중 주식을 모두 매각 또는 사회 환원하고, 현대전자 주식조작과 현대 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 행위에 그가 관련되어 있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확실한 검증을 거친 후에 그의 정책을 노무현과 동일하게 가져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판단이 옳았는가 그릇되었는가 이전에 그 선택의 진심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저는 목사님께서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이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목사님께서 아우의 문제를 앞에 두고 냉정해지기 어려웠을 거란 것은 짐작이 갑니다. 생각보다 더 큰 '몰이해와 비난'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우를 위해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던 상황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아우의 진심은 이러했더라고 변명해주고 싶었을 테지요.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형제의 우애보다 신앙인의 양심을 따라야 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의 문제였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문제가 더 있었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더 나을 뻔했습니다.

목사님께 제가 알고 있는 성경말씀 하나 전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 14절)

감히 누구는 정의이며, 누구는 불의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빛이며 누가 어둠이라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그건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의와 불의는 짝할 수 없으며, 빛과 어둠은 사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목사님의 평안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실린 김민웅목사의 글 원문

하나의 힘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장 15절-17절)

지난 일주일간의 서울 체류는 여러 가지로 저에게 새로운 차원의 충격과 성찰의 기회를 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반도 평화 문제를 놓고 강연과 세미나, 그리고 회의와 좌담회, 방송출연 등으로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특히 북한과 미국간에 선(先)무장해제와 선(先)적대정책 철회의 요구가 서로 엇갈리면서 전개된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는 서울 체류 중이었던 저에게 여러 가지 공적 발언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이를 통해서 나름의 기여를 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 한구석은 심사가 복잡했습니다. 서울 인천 공항에서 떠나오기 직전, 우리 교회 웹사이트 게시판에 이-메일로 간략하게 올려놓은 대로, 대선 정국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소용돌이,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한 중대사를 직접 경험하는 가운데 생각해야 할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민주당을 탈당하고 재벌 2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정당으로 간 제 아우의 정치적 행보가 세간의 비난과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을 접하는 가운데 이를 두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문제를 제기하고 저의 입장과 견해를 물어오는 통에 한반도의 평화 문제와 더불어 서울 체류 내내 저를 사로잡는 화두(話頭)가 되어버렸습니다. 좀더 깊게 따지면, 제 아우의 정치적 선택은 한반도의 요동치는 상황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를 놓고 어떤 길을 마련해 가는 것이 진정 올바른, 그리고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방책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른바 정치적 격동기에 의례 등장하는 철새 운운하면서 변절과 기회주의로 매섭게 몰아치고 있지만 적어도 그런 차원의 선택은 분명 아닌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형으로서 일방적 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옹호가 아닙니다. 제 아우가 그런 수준의 인간은 결코 아니라는 점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냉전수구세력으로서의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절박한 선택의 하나로 그와 같은 선택을 거부하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서 숙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대선이 한반도 남쪽의 현실에서 냉전과 분단이라는 전후질서를 극복하는 응집력을 갖는 선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역사적 진전이 좌절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고뇌하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 결론이었던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큼 한반도의 현실은 지금 절박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냉전수구세력의 공세는 엄청나게 집요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애써서 쌓아온 탈냉전의 역량이 얼토당토않은 정치적 패배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면 그간의 희생과 노력이 너무도 무력하게 묻히고 말지 모른다는 우려가 깊은 것입니다.

해서, 선택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그래서 최선을 다해 혹 그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본다면 지금 쏟아지는 일체의 몰이해와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오늘의 현실을 돌파하려는 그와 같은 선택이 불가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재벌 2세와의 합류라고 하는, 지지기반의 이른바 계급적 내지는 계층적 이동은 실로 기존의 지지자들에게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 배신 내지는 변절로 비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정치적 치명타로 자칫 재기 불가능한 상황을 자초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본인도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선 후보의 아버지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작업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는 점, 그래서 분단체제 안에서 대자본의 민족적 성격이 그런 대로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제 아우의 선택 그 밑바탕에는 민족적 관점에서 보다 큰 대안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충정(忠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선택이 현실에서 성공으로 나타난다면, 지금의 비난 그 절반은 적어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뒤늦게 정당화해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판단이 옳았는가 그릇되었는가 이전에 그 선택의 진심(眞心)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 아우가 숱한 비난을 각오하고 이렇게 한 까닭을 저는 그래서 너무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책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한편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선뜻 행동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형으로서의 저의 고민은 큽니다. 물론 판단의 차이는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열한 현실정치의 장에서 보게 되는 착잡한 한국의 미래와, 그런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이상(理想)을 먼저 기준으로 놓고 보려는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해도 그 책임이 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큰 부담 없이 최선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현실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선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차선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으나 냉전과 분단이라는 전후질서를 극복하는 길은 이런 식으로 한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탈냉전 세력의 집권은 실로 중차대 합니다. 냉전세력의 집권을 막아내는 일은 절박한 역사의 요구입니다. 제 아우는 이 요구에 자신을 몽땅 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치적 판단과 현실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할 내용이 있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기에, 일단 지금으로서는 미루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매우 새롭게 성장하고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일구어지기를 저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로 보다 중요한 것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무수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이들과 뜨겁게 손을 잡는 일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은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역사적 패배주의"에 갇힐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혹 정치적 성공이 이루어진다 해도 역사가 바라는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령 새로운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지도자가 역사의 정도(正道)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나설 수 있게 하는, 또는 그렇지 못하면 그 쪽으로 과감하게 밀어 부칠 수 있는 힘은 보다 밑바닥의 지층(地層)적 변화에서 옵니다. 그러기에 한때 천지개벽하듯 세상을 들었다 놓은 바 있는 이른바 <노풍>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절실한 요구 속에 들어 있는 함성을 자기화(自己化)하는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연대의 건설이 보다 앞서는 일이자 절실한 것입니다. 이들의 체온과 이들의 열정과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역사의 장벽을 함께 뚫어내는 일, 그 일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는 작업, 이것이 역사와 현실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보다 집중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쏟아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혹 현실에서 정치적 패배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로 만나 합쳐진 열정은 새로운 역사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고 역사를 오도하려는 세력의 권세를 저지하거나 꺾으며, 그래서 다음 시대를 여는 맥박이 된다면 그것이 도리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결행하기 전에 좀 의논하지 하는 아쉬움도 깊습니다. 이것이 부디 제 아우에 대한 비난처럼 들리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형으로서의 사랑의 아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와 새삼 마주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화를 이루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라는 도전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현실과 대치하는 경계선에서의 실질적인 선택입니다. 뜬구름 잡는 관념적 작업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힘을 이기는 것을 증언하고 드러내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로마의 권세와 헤롯의 악랄함,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억압, 민중들의 열등감, 패배주의와 맞서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새로운 목적을 가진 공동체,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역사를 뚫어내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능한 원형적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떠나오는 날, 어떤 분에게서 꼭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육군 소장 출신의 국제정치학 박사에다가 80년대에 워싱턴 대사관에서 주미 공사를 지내고 지금은 모 재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족 화합 협의회(민화협)의 중진인 70대 중반의 노신사였습니다. 알고 보니 전두환 정권 시절 당시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밀사(密使)였습니다. 이 밀사라는 것도 전두환 당시 집권자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분 자신이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을 저 또한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들어 알고 있었던 바였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그 분 이름이 나중에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튼 그 분은 평소 제가 쓴 글을 읽고 언제 한번 보았으면 하셨고, 떠나기 전날 제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MBC <100분 토론>에 참여한 것을 보고는 연락을 하셨던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의 인물에게는 육사시절 은사였던 인연으로 정상회담의 밀사역할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신 이 분은 일제시대 무수한 독립지사들을 배출한 만주 용정 출신으로 고 문익환 목사님의 10년 후배라면서 부친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목사님이시고, 그런 배경과 출신으로 해서 독립운동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족운동의 열정을 평생 갖고 사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공동번영 등에 대하여 매우 겸손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작업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져서 역사의 대세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어떻게든지 분단의 시절이 끝나고 겨레가 하나가 되어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절절히 소망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만남이었고 감동적인 개인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당시 정상회담은 남북간에 독자적인 교섭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미국의 간섭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런 노력이 하나 하나 역사의 벽돌이 되어서 오늘에 이른 것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히브리 백성들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다시는 그들의 옛 땅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무기력한 존재 마냥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를 쓰고, 다른 막대기 하나에는 이스라엘로 써서 그 두 개가 하나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막대기는 히브리 백성들이 남과 북,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서로 싸우다가 이후 각기 하나씩 망하더니 결국에는 바빌론 제국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너희들 히브리 백성들은 각기 서로 분열되어 지내다가 이렇게 강대국의 노예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가 되면 새롭게 살리라, 하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의 본문 뒤에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잇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이 두 개의 막대기를 길게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두 개를 위아래로 서로 겹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가 된 막대기에서 유다 막대기와 이스라엘 막대기를 따로 구별해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길게 이으면 이만큼은 유다, 이만큼은 이스라엘 할 수 있겠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에게로 받은 계시대로 하면 서로 구분됨이 없이 <한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서로 간에 차별이 없으며 네가 나이고 내가 곧 너인 상태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따로 갈라지고 떨어져 약한 자가 되어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굵은 막대기가 되어 이 세상의 시련을 힘있게 돌파해내고 마침내 서야 할 곳에 서는 축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분단을 극복한다는 것은 남과 북이 길게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 겹쳐 구별할 수 없는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없이 하나가 되어 강대국에 둘러싸인 현실을 이겨내고 새로운 유형의 삶을 살아내는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두 개의 막대기는 "네 손에서 하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니라, 이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있던 믿음의 사람, 그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감격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남이 하나 되게 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혹 남이 하나 되게 해준다면 그것은 강요이며 다 그 남의 잇속에 맞추어 우리를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 손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굳은 믿음을 가진 이들의 손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믿음에서 패배주의가 사라지고 현실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며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비틀거리지 않고 본래의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수히 주변에서 흔들어 댄 우리 겨레의 역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로 하여금 대세를 눈치보게 만들었고, 약삭빠르게 기회를 엿보는 자가 되게 했으며 중심을 잡고 끝까지 나가는 의지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손에서 갈라지고 분열되었던 역사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 손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과 생명, 평화와 정의, 희망과 믿음, 그리고 꿈과 열정이 있는 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새로운 인간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인간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매우 굳건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매우 생각이 깊고 의지가 강하며 꿈이 결코 퇴색되지 않은 겨레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우 한 분이 제 아우의 일로 제가 마음이 상하였을까 싶고 또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전하고 싶어 이런 글을 우리 교회 웹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그 한 대목이 참으로 귀했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큰 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선 이도 다시 언젠가는 큰 길로 돌아갈 수 있으며 작은 길에서도 큰 길을 뚫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길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려는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삶이 이 역사에 큰 물줄기를 이루어 나갈 때, 갈라지고 떨어져나가고 흐트러졌던 일체의 것들이 여기에 합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나갈 것입니다. 그 하나가 단지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하나가 된 하나"일 때 우리는 그로써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런 힘이 뿜어져 나올 때, 우리 자신의 개인사만이 아니라 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 보고, 그 입이 세상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그 귀가 세상이 놓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손에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고 전쟁을 향해 달려가는 세대를 일깨우며 깨어졌던 것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 되살아 나는 그런 놀라운 감격과 신비의 능력이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손안에서 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부여받은 손으로 말입니다. 그런 사람의 손을 주저앉은 사람들은 붙잡고 일어나려 할 것입니다. 부서진 삶을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해서 새로운 희망 하나를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은 단지 하나의 희망이 아니라 모든 희망의 근거이자 출발이며, 그로써 새로운 세상이 오게 하는 선봉(先鋒)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축복, 간절히 기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한 꿈이자 권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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