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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기자의 '빛과 어둠은 서로 사귈 수 없습니다' 기사 일부
이봉렬 기자의 '빛과 어둠은 서로 사귈 수 없습니다' 기사 일부
설교원고에 대한 오독(誤讀) 유감

이런 와중에 저의 글(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지난 주 한국에 다녀온 직후 교회에서 한 설교원고)로 인해 여러 가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제 자신이 의도했거나 바랬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왕 공적 공간에서 상황이 전개된 만큼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진의가 오독되고 있는 점은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주신 분들에게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ADTOP3@
1. 인터넷 칼럼 웹 사이트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인터넷 논객으로 잘 알려진 공희준씨의 글 "아햏햏 정치인 베스트 5: 2002년 한국정치의 화두 '아햏햏'"가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머릿글이 있다는 것을 지인으로부터 전해 알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을 탈당해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로 당적을 옮긴 김민석 전 의원에 대해 호사가들은 김 전 의원의 친형인 김민웅 목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김민웅 목사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동생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결정'을 했다는 짤막한 코멘트만을 던지고 짧은 국내체류 일정을 끝마쳤다고 한다. 김민웅 목사가 김 전 의원을 신랄히 질타하기를 바랬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두루뭉술한 김민웅씨의 발언이 아쉽게 느껴질 것이다. "동생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결정"을 했다는 언급만을 놓고 보자면 잘했다는 것인지 잘못했다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든 까닭이다.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를 자처한 김민석 전 의원이 경솔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김 전 의원의 심모원려를 헤아리지 못하는 필부필녀의 성급한 판단이 안타깝다는 것인지 종잡기 어렵다."

공희준씨가 인용한 대목은 제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 우리 교회(뉴저지 길벗교회) 웹 사이트 (www.gillbott.org) 게시판에 올려서 이 문제와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한 내용의 한 부분입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강연 등의 일정 때문에 일주일 정도 체류했던 국내에서 제가 그런 언급을 하고 떠나온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인들과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왔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전달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다 싶어 우리 교회 웹사이트에 공개되는 설교원고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참고 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돌아온 그 주일 이 문제와 관련한 설교를 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설교의 내용으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한 고심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을 통해서, 제 설교 원고는 '서프라이즈 사이트'에 '김민웅 목사의 편지'라는 방식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서프라이즈 편집진은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보내왔고, 제 자신도 본래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공개된 설교였다는 점에서 이왕지사 독자들에게 제대로 읽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안은 보다 공개적인 논쟁의 장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서 원문의 메시지는 민족의 통일

2. 우선 설교 내용에서 결코 오해가 있어서는 아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 서 본문의 인용입니다. 그것은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성서해석이 아닙니다. 후보단일화의 이야기는 설교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반도의 전후질서인 분단과 냉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남과 북, 우리 민족 전체의 역량을 어떻게 하나 되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성서적 성찰의 소산입니다.

북한 핵무장 논란으로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가 최대의 주제로 내게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그것은 어떤 특정한 지도자의 역량과 지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터져나오는 사랑과 생명, 평화와 정의, 희망과 믿음, 꿈과 열정을 그 밑바닥의 근본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역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보다 장기적이고 원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오늘의 현실에 임해야 하는 신앙인의 결단을 촉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설교본문에도 밝혔듯이, "신앙은 철저하게 현실과 대치하는 경계선에서의 실질적인 선택입니다. 뜬구름 잡는 관념적 작업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힘을 이기는 것을 증언하고 드러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세상대세가 어떤 방향으로 가든 흔들림 없이 그리고 꿀리지 말고 우리들의 손안에서 역사의 의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세에도 의존하지 말고, 언론들의 거짓에도 휘둘리지 말고, 특정 기득권 집단의 패권에도 주눅들지 말고, 또 그 어떤 지도자의 개인적 기량에 과도한 기대를 걸지도 말고 정치적 변화에 일희일비하지도 말고 우리들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로써 갈라진 우리 민족이 진정한 하나가 되는 역사를 만들어내는 꿈과 열정을 품자는 것에 그 뜻이 있습니다.

아무리 합쳐봐야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지 하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단한 통일지향적 탈냉전세력이 집권한다 해도 분단질서의 극복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또 혹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이 성사된다해도 이런 하나 되기의 힘이 우리 겨레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한, 역사는 진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밝힌 것입니다.

3. 한편, 제 아우의 정치적 선택과 관련한 제 논지의 초점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민석이의 행보는 비난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해도 적어도 철새 운운의 기회주의적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무조건적 매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옳았는가의 문제를 별도로,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분단과 냉전질서의 극복을 위한 현실적 방안을 고심하던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는 점만큼은 주목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왜? 이 문제는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그나마 일정한 진전을 이룩한 전후질서 극복의 역량이 부시정권과 이회창을 비롯한 냉전수구 세력의 협공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과연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실질적인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이 민석이와 같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번 대선의 핵심적 과제는 바로 이 전후질서 극복의 기반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의 모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가지고 육박해 들어올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저는 형으로서 민석이가 겪고 거쳤던 고뇌의 과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석이의 선택에 제가 '동의한다, 하지 않는다'의 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입니다. 이 뼈아픈 이해의 과정 없이는 우리 자신도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고 실천력 있는 대안을 만드는 작업에 그리 큰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전후질서 극복의 현실적 대안은 무엇인가?

어떻든 간에, 제 아우의 문제에 대하여 형이 보다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더 이상의 것을 저에게 요구하는 것은 도를 넘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필요하다면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그 어떤 형도 혹 아무리 그의 동생이 잘못한 일을 했다해도 자신의 실제(實弟)를 공개적으로 난도질하면서 비판하는 순간, 인륜의 근본을 허무는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선택이 요구된다면, 저는 함께 채찍을 맞을 도덕적 연대책임을 지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어떤 오류의 정당화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둘째, 오늘의 현실에서 우선적인 작업은 '노풍'에 집약되어 있는 역사의 요구를 최대한 실현하고 이 요구의 기반을 확대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정치상황과 관련한 제 글의 핵심적인 논지입니다. 제 설교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길지만 인용해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한편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선뜻 행동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형으로서의 저의 고민은 큽니다. 물론 판단의 차이는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열한 현실정치의 장에서 보게 되는 착잡한 한국의 미래와, 그런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이상(理想)을 먼저 기준으로 놓고 보려는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해도 그 책임이 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큰 부담 없이 최선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현실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선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차선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으나 냉전과 분단이라는 전후질서를 극복하는 길은 이런 식으로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탈냉전 세력의 집권은 실로 중차대합니다. 냉전세력의 집권을 막아내는 일은 절박한 역사의 요구입니다. 제 아우는 이 요구에 자신을 몽땅 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치적 판단과 현실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할 내용이 있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기에, 일단 지금으로서는 미루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매우 새롭게 성장하고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일구어지기를 저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로 보다 중요한 것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무수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이들과 뜨겁게 손을 잡는 일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은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역사적 패배주의"에 갇힐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혹 정치적 성공이 이루어진다 해도 역사가 바라는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령 새로운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지도자가 역사의 정도(正道)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나설 수 있게 하는, 또는 그렇지 못하면 그 쪽으로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은 보다 밑바닥의 지층(地層)적 변화에서 옵니다.

그러기에 한때 천지개벽하듯 세상을 들었다 놓은 바 있는 이른바 '노풍'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절실한 요구 속에 들어 있는 함성을 자기화(自己化)하는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연대의 건설이 보다 앞서는 일이자 절실한 것입니다. 이들의 체온과 이들의 열정과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역사의 장벽을 함께 뚫어내는 일, 그 일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는 작업, 이것이 역사와 현실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보다 집중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쏟아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혹 현실에서 정치적 패배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로 만나 합쳐진 열정은 새로운 역사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고 역사를 오도하려는 세력의 권세를 저지하거나 꺾으며, 그래서 다음 시대를 여는 맥박이 된다면 그것이 도리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노풍' 속에 있는 역사의 요구 자기화 과정 우선되어야

따라서, '노풍'을 새롭게 살리고자하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분노하는 분들은 부디 저를 공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노풍'의 적(敵)이 아닙니다. 저를 공격하는 것은 적을 잘못 조준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역량을 우리 안에서 스스로 손상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그 일에 저의 삶을 바쳐온 사람입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국 땅에서 귀국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뭐 별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스스로의 자산 하나라도 적 앞에서 훼손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부탁입니다. 좋아할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논쟁 방식에 대한 성찰적 반성이 필요합니다.

민석이의 고뇌와 선택이 혹 정치적 현실에서 성공으로 입증된다고 해도 이 두 번째의 논지를 담고 있지 않는 한, 그 선택은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는 형으로서 이 점을 아우에게 끊임없이 일깨울 것입니다.

노무현도 '노풍'을 보다 심화학습해야

실로, 지금 우리는 '노풍' 속에 집약되어 있는 역사의 함성을 최대한 모두의 염원으로 재점화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무현 개인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노풍'이 한참 상승기조에 있을 때 신문 칼럼을 통해서 제 자신 경계했던 바가 있습니다. 노무현 자신도 '노풍'의 요구를 철저하게 자기화, 체화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자신도 이 '노풍'의 요구 앞에서 좀더 분명하게 변화해나가야 합니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 자체가 역사의 대의를 이루는 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노무현 자신도 '노풍'을 바로 알지 못해 적지 않은 실수와 패착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노무현에게도 '노풍'의 실체를 좀더 깊이 학습하도록 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노풍'이 잦아든 것에는 노무현 자신의 '노풍' 인식의 불철저성에도 기인하는 점이 있다는 이유에서 이는 대단히 중요하게 주목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몽준의 등장은 노무현이 '노풍'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의 상실이나 하락과도 일정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풍' 자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이 될 때 노무현은 노무현다워질 것이고 역사의 방향은 비틀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역사의 육성이 현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글에서 정치현실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점이 분명하게 이해된다면 더 이상의 오해나 오독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4. 이제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 하나 더 언급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 민감하기 짝이 없는 '후보 단일화 문제'입니다. 이것은 저의 설교에서 다루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오고 있는 듯합니다.

후보 단일화문제는 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노무현 사퇴, 정몽준 후보'라는 등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민주당 내의 후단협은 바로 이러한 인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접근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방식입니다. 공정한 접근이 아닙니다.

정몽준은 대중의 지지를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 자신이 체화시켜야 할 역사의 요구를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몽준의 정치철학적 한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지지율이 하락 내지는 답보상태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회창 승세 속, 후보 단일화 문제 새롭게 다가서야

이번 대선의 일차적 목표는 '노풍'을 진원지로 하는 세력의 집권에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은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현실적으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노무현 진영은 대답해야 합니다. 이회창 집권이라는 정치적 패배를 우리의 염원과 열정, 그리고 지지에 대한 응답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반드시 강조하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냉전수구 세력과 미국의 지배정책이 가지고 있는 악랄함입니다. 이것은 결코 안이하게 지나갈 일이 아닙니다. 종말론적 호들갑도 아니고 과민반응도 아닙니다. 무고한 나라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함부로 죽이고, 그 백성들의 일부를 쿠바의 관타나모 해군기지의 감옥에 처넣어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고 있는 나라가 한반도의 현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강대국의 지배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권세를 잡으려는 세력이 지금 대선의 승자로 점쳐지고 있는 판국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일차적 목표가 실현되지 못할 경우, 최소한 냉전수구세력의 집권 저지라는 이차적 목표는 달성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무현-정몽준 지지 세력의 '대정치'를 결단해야 할 시점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이 시대의 과제를 하나로 묶어세워 함께 밀고 나갈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풍'이 보다 확고한 밑바닥의 기반을 다지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노'이든 '정'이든 현실적으로 하나로 대표주자를 내세워야 냉전수구세력의 집권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하는 것이 차선입니다. 이것은 노무현이나 정몽준 누구에게도 불공정한 논리가 아닙니다.

이후 등장하는 정권은 '노풍' 속에 집약된 역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순진하게 보는 정치적 로맨티시즘이 아닙니다. 그 외에 방법이 없다면 택해야 하는 방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11월 중순에서 말까지 두 세력은 시점을 정해 지지세를 기반으로 단독 후보를 내세우는 문제를 진지하게 사심 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를 이룩하는 기조를 함께 정해야 합니다. 누가 대표선수로 나가든 중요한 골간은 그렇게 정해서 전후질서 극복의 틀을 실현시켜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렇게 날이 갈수록 똘똘 뭉치고 있는 극단적 냉전수구세력이 아닌 한 모두 이 편으로 삼아 탈냉전 세력의 외연을 최대한 넓히는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단독 승리가 힘든 경우 노무현에게도 결코 불리할 것이 없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집권에 성공하고, 이후 집권방식과 구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한계를 깨나가는 작업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장기적 목표와 단기적 목표를 설정해서 치열한 선택과 실천을 해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작업이 실현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결단이 절정으로 향하는 시각에 냉전수구세력/사대식민주의 세력의 집권이 확실시되는 지점에서 외면해서는 아니 되는 선택치의 하나로 남겨두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밑바닥 지층의 변혁이 관건

바라기로는 노무현이 대세를 장악할 수 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역사가 처한 현실입니다. 탈냉전 세력의 역량이 드러내고 있는 실천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정치적 패배가 역사적 패배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패배하지 않고 진보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냉전수구세력/사대식민주의 세력의 집권은 우리의 역사를 엄청나게 후퇴시킬 것입니다. 이 시기 우리에게 있어서 '주 모순'이 무엇인지 '부차적 모순'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을 모아봅시다.

실로,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 실질적으로 누가 있을 것인가가 보다 중요합니다. 김대중 정부의 성공과 실패에서 우리는 이 점을 뼈저리게 교훈으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정권은 달라졌지만, 중심 세력의 교체에는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이제 보다 본격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 중심세력, 주류세력의 교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밑바닥 지층의 변혁이 그래서 먼저, 집중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이겨도 질 수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져도 이깁니다.

'지면 끝이다'는 따라서 물론 아닙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입니다. 분명히 해둡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힘이 있는 한 우리는 사실상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올바른 역사를 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평화의 내일을 살아낼 것입니다. 하여, 진보는 그 어떤 현실에서도 역사의 대의를 망각하지 않고 끊임없는 영구혁명의 정신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져나갑니다.

'그 날을 위해', 우리 이제 흩어지지 맙시다.

덧붙이는 글 |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실린 김민웅목사의 글 원문

하나의 힘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장 15절-17절)

지난 일주일간의 서울 체류는 여러 가지로 저에게 새로운 차원의 충격과 성찰의 기회를 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반도 평화 문제를 놓고 강연과 세미나, 그리고 회의와 좌담회, 방송출연 등으로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특히 북한과 미국간에 선(先)무장해제와 선(先)적대정책 철회의 요구가 서로 엇갈리면서 전개된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는 서울 체류 중이었던 저에게 여러 가지 공적 발언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이를 통해서 나름의 기여를 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 한구석은 심사가 복잡했습니다. 서울 인천 공항에서 떠나오기 직전, 우리 교회 웹사이트 게시판에 이-메일로 간략하게 올려놓은 대로, 대선 정국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소용돌이,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한 중대사를 직접 경험하는 가운데 생각해야 할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민주당을 탈당하고 재벌 2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정당으로 간 제 아우의 정치적 행보가 세간의 비난과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을 접하는 가운데 이를 두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문제를 제기하고 저의 입장과 견해를 물어오는 통에 한반도의 평화 문제와 더불어 서울 체류 내내 저를 사로잡는 화두(話頭)가 되어버렸습니다. 좀더 깊게 따지면, 제 아우의 정치적 선택은 한반도의 요동치는 상황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를 놓고 어떤 길을 마련해 가는 것이 진정 올바른, 그리고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방책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른바 정치적 격동기에 의례 등장하는 철새 운운하면서 변절과 기회주의로 매섭게 몰아치고 있지만 적어도 그런 차원의 선택은 분명 아닌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형으로서 일방적 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옹호가 아닙니다. 제 아우가 그런 수준의 인간은 결코 아니라는 점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냉전수구세력으로서의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절박한 선택의 하나로 그와 같은 선택을 거부하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서 숙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대선이 한반도 남쪽의 현실에서 냉전과 분단이라는 전후질서를 극복하는 응집력을 갖는 선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역사적 진전이 좌절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고뇌하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 결론이었던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큼 한반도의 현실은 지금 절박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냉전수구세력의 공세는 엄청나게 집요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애써서 쌓아온 탈냉전의 역량이 얼토당토않은 정치적 패배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면 그간의 희생과 노력이 너무도 무력하게 묻히고 말지 모른다는 우려가 깊은 것입니다.

해서, 선택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그래서 최선을 다해 혹 그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본다면 지금 쏟아지는 일체의 몰이해와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오늘의 현실을 돌파하려는 그와 같은 선택이 불가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재벌 2세와의 합류라고 하는, 지지기반의 이른바 계급적 내지는 계층적 이동은 실로 기존의 지지자들에게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 배신 내지는 변절로 비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정치적 치명타로 자칫 재기 불가능한 상황을 자초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본인도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선 후보의 아버지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작업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는 점, 그래서 분단체제 안에서 대자본의 민족적 성격이 그런 대로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제 아우의 선택 그 밑바탕에는 민족적 관점에서 보다 큰 대안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충정(忠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선택이 현실에서 성공으로 나타난다면, 지금의 비난 그 절반은 적어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뒤늦게 정당화해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판단이 옳았는가 그릇되었는가 이전에 그 선택의 진심(眞心)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 아우가 숱한 비난을 각오하고 이렇게 한 까닭을 저는 그래서 너무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책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한편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선뜻 행동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형으로서의 저의 고민은 큽니다. 물론 판단의 차이는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열한 현실정치의 장에서 보게 되는 착잡한 한국의 미래와, 그런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이상(理想)을 먼저 기준으로 놓고 보려는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해도 그 책임이 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큰 부담 없이 최선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현실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선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차선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으나 냉전과 분단이라는 전후질서를 극복하는 길은 이런 식으로 한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탈냉전 세력의 집권은 실로 중차대 합니다. 냉전세력의 집권을 막아내는 일은 절박한 역사의 요구입니다. 제 아우는 이 요구에 자신을 몽땅 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치적 판단과 현실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할 내용이 있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기에, 일단 지금으로서는 미루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매우 새롭게 성장하고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일구어지기를 저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로 보다 중요한 것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무수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이들과 뜨겁게 손을 잡는 일이 우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은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역사적 패배주의"에 갇힐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혹 정치적 성공이 이루어진다 해도 역사가 바라는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령 새로운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지도자가 역사의 정도(正道)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나설 수 있게 하는, 또는 그렇지 못하면 그 쪽으로 과감하게 밀어 부칠 수 있는 힘은 보다 밑바닥의 지층(地層)적 변화에서 옵니다. 그러기에 한때 천지개벽하듯 세상을 들었다 놓은 바 있는 이른바 <노풍>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절실한 요구 속에 들어 있는 함성을 자기화(自己化)하는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연대의 건설이 보다 앞서는 일이자 절실한 것입니다. 이들의 체온과 이들의 열정과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역사의 장벽을 함께 뚫어내는 일, 그 일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는 작업, 이것이 역사와 현실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보다 집중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쏟아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혹 현실에서 정치적 패배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로 만나 합쳐진 열정은 새로운 역사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고 역사를 오도하려는 세력의 권세를 저지하거나 꺾으며, 그래서 다음 시대를 여는 맥박이 된다면 그것이 도리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결행하기 전에 좀 의논하지 하는 아쉬움도 깊습니다. 이것이 부디 제 아우에 대한 비난처럼 들리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형으로서의 사랑의 아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와 새삼 마주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화를 이루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라는 도전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현실과 대치하는 경계선에서의 실질적인 선택입니다. 뜬구름 잡는 관념적 작업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힘을 이기는 것을 증언하고 드러내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로마의 권세와 헤롯의 악랄함,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억압, 민중들의 열등감, 패배주의와 맞서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새로운 목적을 가진 공동체,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역사를 뚫어내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능한 원형적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떠나오는 날, 어떤 분에게서 꼭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육군 소장 출신의 국제정치학 박사에다가 80년대에 워싱턴 대사관에서 주미 공사를 지내고 지금은 모 재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족 화합 협의회(민화협)의 중진인 70대 중반의 노신사였습니다. 알고 보니 전두환 정권 시절 당시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밀사(密使)였습니다. 이 밀사라는 것도 전두환 당시 집권자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분 자신이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을 저 또한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들어 알고 있었던 바였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그 분 이름이 나중에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튼 그 분은 평소 제가 쓴 글을 읽고 언제 한번 보았으면 하셨고, 떠나기 전날 제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MBC <100분 토론>에 참여한 것을 보고는 연락을 하셨던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의 인물에게는 육사시절 은사였던 인연으로 정상회담의 밀사역할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신 이 분은 일제시대 무수한 독립지사들을 배출한 만주 용정 출신으로 고 문익환 목사님의 10년 후배라면서 부친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목사님이시고, 그런 배경과 출신으로 해서 독립운동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족운동의 열정을 평생 갖고 사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공동번영 등에 대하여 매우 겸손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작업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져서 역사의 대세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어떻게든지 분단의 시절이 끝나고 겨레가 하나가 되어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절절히 소망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만남이었고 감동적인 개인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당시 정상회담은 남북간에 독자적인 교섭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미국의 간섭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런 노력이 하나 하나 역사의 벽돌이 되어서 오늘에 이른 것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히브리 백성들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다시는 그들의 옛 땅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무기력한 존재 마냥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를 쓰고, 다른 막대기 하나에는 이스라엘로 써서 그 두 개가 하나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막대기는 히브리 백성들이 남과 북,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서로 싸우다가 이후 각기 하나씩 망하더니 결국에는 바빌론 제국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너희들 히브리 백성들은 각기 서로 분열되어 지내다가 이렇게 강대국의 노예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가 되면 새롭게 살리라, 하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의 본문 뒤에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잇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이 두 개의 막대기를 길게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두 개를 위아래로 서로 겹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가 된 막대기에서 유다 막대기와 이스라엘 막대기를 따로 구별해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길게 이으면 이만큼은 유다, 이만큼은 이스라엘 할 수 있겠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에게로 받은 계시대로 하면 서로 구분됨이 없이 <한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서로 간에 차별이 없으며 네가 나이고 내가 곧 너인 상태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따로 갈라지고 떨어져 약한 자가 되어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굵은 막대기가 되어 이 세상의 시련을 힘있게 돌파해내고 마침내 서야 할 곳에 서는 축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분단을 극복한다는 것은 남과 북이 길게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 겹쳐 구별할 수 없는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없이 하나가 되어 강대국에 둘러싸인 현실을 이겨내고 새로운 유형의 삶을 살아내는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두 개의 막대기는 "네 손에서 하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니라, 이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있던 믿음의 사람, 그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감격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남이 하나 되게 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혹 남이 하나 되게 해준다면 그것은 강요이며 다 그 남의 잇속에 맞추어 우리를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 손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굳은 믿음을 가진 이들의 손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믿음에서 패배주의가 사라지고 현실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며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비틀거리지 않고 본래의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수히 주변에서 흔들어 댄 우리 겨레의 역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로 하여금 대세를 눈치보게 만들었고, 약삭빠르게 기회를 엿보는 자가 되게 했으며 중심을 잡고 끝까지 나가는 의지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손에서 갈라지고 분열되었던 역사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 손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과 생명, 평화와 정의, 희망과 믿음, 그리고 꿈과 열정이 있는 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새로운 인간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인간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매우 굳건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매우 생각이 깊고 의지가 강하며 꿈이 결코 퇴색되지 않은 겨레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우 한 분이 제 아우의 일로 제가 마음이 상하였을까 싶고 또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전하고 싶어 이런 글을 우리 교회 웹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그 한 대목이 참으로 귀했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큰 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선 이도 다시 언젠가는 큰 길로 돌아갈 수 있으며 작은 길에서도 큰 길을 뚫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길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려는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삶이 이 역사에 큰 물줄기를 이루어 나갈 때, 갈라지고 떨어져나가고 흐트러졌던 일체의 것들이 여기에 합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나갈 것입니다. 그 하나가 단지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하나가 된 하나"일 때 우리는 그로써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런 힘이 뿜어져 나올 때, 우리 자신의 개인사만이 아니라 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 보고, 그 입이 세상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그 귀가 세상이 놓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손에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고 전쟁을 향해 달려가는 세대를 일깨우며 깨어졌던 것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 되살아 나는 그런 놀라운 감격과 신비의 능력이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손안에서 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부여받은 손으로 말입니다. 그런 사람의 손을 주저앉은 사람들은 붙잡고 일어나려 할 것입니다. 부서진 삶을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해서 새로운 희망 하나를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은 단지 하나의 희망이 아니라 모든 희망의 근거이자 출발이며, 그로써 새로운 세상이 오게 하는 선봉(先鋒)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축복, 간절히 기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한 꿈이자 권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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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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