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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타곤은 세계의 어떤 전쟁에도 대비할 수 있는 정교한 워 게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오랜 워 게임(War Game)의 시대를 머니 게임(Money Game)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끝내고 피스 게임(Peace Game)으로 인간의 의사와 관계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피스 게임의 시대가 바로 환경재앙이 '적'이 되면서 사회통합을 일궈내서, 증오가 아닌 사랑이 사회구성의 원리가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 사랑의 패러다임 세상입니다.

근대국가의 와해 = 근대합리주의의 파탄

대변화가 모두 앞에서 말한 과잉의 자기전개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 무엇보다 근대국가의 와해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국가와해'가 빚는 충격은 앞으로 엄청날 것입니다.

근대국가의 와해를 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작고한 서울대학의 이용희 교수가 80년대 후반부터 담론을 시작했고, 요즘은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가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느낌뿐입니다.

정작 서양의 근대합리주의자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대로 틀 속의 현상들을 주어 모으는 데만 급급해서 이들에게 대변화는 증후군(syndrome)이라는 병일 뿐입니다. '세계화'를 인식하는 것도 그렇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아나키즘, 페미니즘, 에코이즘, 반전운동을 모두 정상에서 벗어난 신드롬이라는 것입니다.

ⓒ 김민수
그러나 다른 한편 근대국가와 그 세계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만 있어서는 예의 '터널'은 그 초입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근대국가의 와해가 바로 근대합리주의의 파탄임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근대국가란 말을 달리하면 '근대합리주의체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 정신과 육체를 둘로 나누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근거한 근대합리주의는 지난 300년 근대국가로 '물화(物化)?'되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근대합리주의의 최고의 형태가 바로 근대국가입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모든 이른바 학문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국가에 '봉사'해온 것입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설명해내서 그것을 제도로 엮어내고, 나머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종교 쪽으로 미루어 줘서 국가와 종교가 세상을 나누어 지배해 온 것입니다.

이런 체제,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꾸민 틀', 현대물리학이 그게 아니라고 항변해도 동양철학이 거기 대신하는 세계관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버티던 근대합리주의가 지금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꾸민 틀',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것은 현실에서는 바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편에선 기존 정치ㆍ경제ㆍ사회 시스템이 깨지고 다른 한편에선 갖가지 재앙이 중첩되고 있습니다.

40세 된 남자의 정충이 20대보다 많은 역전이 시작되고 20, 30대 여성들이 폐경을 겪고 있는 재앙, 그럼에도 꾸민 틀이 거기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서 혼란이 가중되는 이 사태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이아의 보복...사망인구의 40%가 환경질병으로 사망

하늘은 사람을 낳아 만물로써 길렀거늘, 사람은 하늘에 하나도 보답하는 바가 없구나.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天生萬物以養人 人無一德以報天 殺! 殺! 殺! 殺! 殺! 殺! 殺!).

중국 사천(四川)공원에 있는 유명한 칠살비(七殺碑)입니다. 이 시를 지어 비(碑)로 남긴 장헌충(張獻㥙)이야말로 전투적 환경운동의 원조입니다.

요즘 보면 가이아(생명으로서의 지구)의 보복은 이미 '세계화를 완성'한 것 같습니다. 환경의 위협은 이제 일상화해서 우리가 매일 보고 느끼지만 전 세계 사망인구의 40%가 환경오염이나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는 보도는 충격입니다.

▲ 가이아(생명으로서의 지구)의 보복은 이미 '세계화를 완성'한 것 같다. 사진은 환경재앙 문제를 다룬 마당극의 한 장면.
ⓒ 김용한
'전 세계 사망인구의 40%가 환경오염 또는 환경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 최근 엘니뇨 등 이상기후는 이 같은 수치를 더욱 높일 것이다. 코넬대학 연구팀은 2001년 10월 30일 <바이오 사이언스>지 10월호에 '일상생활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통제센터(USCDC) 등에서 조사된 다양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연구팀의 데이비드 파이멘탈 교수(생태학)는 '사람이 넘치는 도시생태계에서는 잊혀졌던 질병이 다시 만연하게 될 것이며 특히 기상변화로 야기되는 기온상승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질병을 발생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또 매년 공기오염물질이 40억-50억 명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는 인구증가율보다 3배나 빠른 자동차증가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달팽이 등 흡충류에 딸린 기생충 등으로 인한 질병 때문에 매년 1백만 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환경과 위생에 무관심한 인간이 이들 기생충에 보다 좋은 서식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매년 수백만 명이 '환경재해자'가 될 것이며 필사적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 조선일보


이 보고서의 제목은 '일상생활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입니다. 환경의 위협이야말로 '급박하고 분명한 위협(imminent and clear danger)', 미국 헌법이 규정한 적이기에 충분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environment)을 글자 그대로 '둘러싸고 있는 주변'으로 인식하는 대신 삶의 중심에 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합리주의는 절대로 이 '환경'을 중심에 놓을 수가 없습니다.

증오의 시스템인 근대국가는 사랑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는 이 환경을 주적(主敵)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이른바 미 국방성 보고서가 기후 온난화라는 인류의 재앙을 운위하면서 그것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그럴듯한 적'을 구할 수 있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가 임박한 재앙을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이며, 더구나 과잉과 적의 부재로 실제로 무력해져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입니다.

석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식으로 환경재앙도 단순한 예외로 간주하면서, 마치 쓰레기를 집밖으로 버리듯 체제 밖으로 밀어냅니다.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문제를 왜곡해 가는 것입니다.

동양에 동양철학은 없다?

<르몽드>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오늘의 세계를 '지적 빙하기'라고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지난날의 빙하기 공룡처럼 오늘의 공룡, 국가가 이 지적 혼돈으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이라고는 그 칼럼니스트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근대합리주의가 어떻게 버티든 이렇게 귀결은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 아나키즘이나 페미니즘, 에코이즘들도 예의 근대합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기의 의지를 관철하기는커녕 '체제' 속에 매몰되고 말 것이라는 점입니다.

▲ 사람과 자연의 순환과 공생을 이야기하는 실상사 뒷간. 실상사에서는 이곳에서 거름을 생산하여 논과 밭에 뿌려줌으로써 먹을거리로 돌려 받는다.
ⓒ 임윤수
근본주의적인 생태주의도 만약 장헌충처럼 하늘과 나를 가르는 이원론적인 입장에 서 있다면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예컨대 유기농으로 재배한 음식만 먹는 일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구가 먹여 살릴 수 있는 인구는 15억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어쩔 것입니까. 과잉시대의 삶은 그런 단순한 원리주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인간을 지구라는 생명체의 암이라고 폄하(貶下)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깊은 고민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만들어 가는 의지'에 순응하는 외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 '외길'에 들어 설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은 우리 스스로가 근대합리주의를 버리는 일입니다.

근대주의인 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합리주의라는 옷을 벗어 던지는 일,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일원론을 획득하고, 대혼돈을 거두어 낼 지혜를 얻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흔히 서양의 젊은이들이 근대합리주의에서 도망해 동양으로 오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불교 쪽에서 갈증을 해소하지만 동양의 체제도 벌써 한나라 때부터 권력이 유교와 제휴한 이래 이원론적인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은 동양의 체제(體制) 어디에도 없습니다. 종교와 권력이 세상을 나누어 지배하게 된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동양에 동양철학은 없습니다. 노자(老子)는 소를 타고 함곡관을 빠져나갔습니다. 주역 하나만 봐도 그 경위는 소상합니다. 한나라 이후에는 전혀 발전이 없었습니다.

공자가 덧붙인 의리역(義理易)이 중용(中庸)등 유교철학에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하나로 보아 내는, '만들어 가는 의지'의 공부길이랄 수 있는 상수역(常數易)은 한낱 점치는 방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앞에서 사미르 아민이 변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또 카프라가 말하는 '인식의 위기'가 가장 심각한 곳이 이 땅이라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바로 여기가 근대합리주의가 무너지고 거기 대신하는 세상이 열릴 곳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대표해서 낡은 패러다임이 빚은 업보(業報)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근대합리주의가 무너지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너희들부터 먼저 변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서둘러 '근대적 자아(自我)'를 해체(解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⑥나는 알았네 생명! ⑦만들어가는 의지의 공부길 ⑧대~한민국의 아이디 등의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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