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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만들어 가는 의지'는 지금 전일(全一)적인 세계관, 주관과 객관을 하나로 하는 입장을 요구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정체성을 물으면서 '사랑의 패러다임'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들어 가는 의지는 달리 밖에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우리는 우주의 자기 전개, 만들어 가는 의지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인도의 요기 가운데 샤카르는 모든 인류의 역사를 4단계의 순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무인(武人)이 권력을 잡으면 지식인(승려 포함)이 그 뒤를 잇고 다시 재물의 시대가 되면서 부패해져서 노동계급의 폭력이 혼란을 몰아오고 그러면 다시 무인이 등장해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세계사든 어느 나라든, 이런 법칙이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순환으로 앞일을 예언해서 그 '합리성'을 증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란의 팔레비 국왕 시대는 무인시대 말기여서 지식인이 등장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 마침 호메이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도 박정희의 등장과 종교인ㆍ지식인ㆍ학생의 저항, IMF와 벤처, 부동산투기 열풍을 거쳐 노무현 노동시대의 혼란을 거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뭔가 무인(武人)적인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는 이성(理性)이 아니라 인성(人性)이 만들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통틀어 물리적인 힘이나 지적인 능력, 돈 버는 재주, 노동 이런 4가지 인성(人性)의 순환, 되풀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동양사상에서 주장하듯, 예컨대 화성의 기운을 받은 사람이 무인(武人)이 된다는 식으로 '더 큰 질서'가 그 위에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실체적 진실'은 우리가 전혀 돌아보지 않던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샤카르는 그러나 인류가 오랜 4단계 순환의 되풀이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내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끝없는 되풀이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웰빙 신드롬은 아주 소중한 조짐

요즈음 이른바 웰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웰빙은 지난 시대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던 가치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전에 TV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프로가 선풍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누가 '웰빙'으로 정리한 것 같습니다.

'소득 2만 달러'가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는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사람다운 삶이라는 바람이 이 생경한 외래어에 의탁하고 있는 부분에서 또 다른 '만들어 가는 의지'를 봅니다.

사실 이런 흐름을 올바로 이끌어 낸다면 우리가 직면한 혼돈을 크게 줄여 갈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것을 체제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저들의 삶의 방식(way of life)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영국군은 영국과 영국인의 생활방식을 지킨다'라는 식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견줄 한국적 생활철학이 없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자본주의는 고통 속에서 발전하고 그 고통이 문화로 '침전'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없어서 이데올로기만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화의 부재, 이데올로기의 난무가 '역경(逆境)의 공능(功能)'으로 나타난 것이 웰빙 신드롬입니다. 이 웰빙이 한국적 삶의 방식이 된다면 그야말로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 이른바 웰빙 바람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데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 안현주
세계에서 인구대비 음식점이 가장 많은 나라는 틀림없이 한국일 것입니다. 요식업중앙회에 등록된 식당만 45만 개소, 인구 1백명에 1개꼴입니다.

간이식당을 더하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농수산물 1년 생산액과 맞먹는 연간 15조가 넘는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습니다.

수출주도형 경제여서 주된 교환관계가 국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먹고사는 방법이 음식점뿐입니다. 무역대국이라지만 일본은 대외 의존도가 20% 남짓이어서 나름대로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 살림의 70% 이상이 밖에 매여 있어서 남 뒤쫓기에 바쁘고 또 이것저것 뭐가 좀 잘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거기 달려든다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청와대 앞에서 냄비들이 벌인 데모는 의미심장합니다. 장기불황으로 식당에 손님이 줄어서 못살겠다는 것이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아무튼 웰빙이 삶의 방식, 생활철학으로 자리 잡으면 이런 밑바탕부터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물질적 풍요의 허상을 밑바닥부터 쓸어 낼 수 있어서 웰빙 신드롬은 아주 소중한 조짐입니다.

조짐, 그것을 읽고 거기 순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만들어 가는 의지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거기 익숙해 가는 것이 참다운 공부입니다.

쌀은 곧 사람

사업이라면 비즈니스지만 원래 사업(事業)이라는 말은 공자가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사업은 무슨 돈 버는 것이 아닙니다.

우 임금의 치수(治水)사업처럼 '성인이 하늘의 뜻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사업을 찾아내서 해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의 패러다임이 만들어 갈 세상을 거들어서 혼란을 줄여 가는 것이 우리 사업이며 동시에 궁극적인 구도의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앞으로 운동은 '사업'입니다. 외국에서도 NPO(NonProfit Organization)라고 해서 비영리법인을 만들어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쌀에서 아주 큰 사업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백미는 순전히 보관 편의 때문에 현미의 껍질과 씨눈을 사정없이 깎아버린 '합리주의' 그 자체입니다.

이와 달리 배아미(胚芽米)는 씨눈이 살아있는 채로 정미하는 새로운 백미, 말하자면 탈(脫)근대주의적인 제품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씨눈이 물과 만나면 생명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새로운 쌀이 근대주의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음식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 '사람인 우리 쌀'이 외국 쌀이 시판되면서 총체적 위기에 함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먹거리나 먹는 태도가 사람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음식은 곧 사람이기도 합니다. 쌀은 모든 음식물 가운데서 가장 소화흡수율이 높아서 95%나 됩니다(밀은 86%).

어린 아기나 환자에게 미음이나 죽을 쑤어 먹이는 것을 생각하면 쌀이야말로 사람이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인 우리 쌀'이 지금 외국 쌀이 시판되면서 총체적 위기에 함몰하고 있습니다.

우선 음식점에서건 집에서건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씹어보세요. 서너 번 씹어서 흐물흐물 넘어가면 '삭은 밥'입니다. 초밥처럼 '똑똑한' 밥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삭은 밥, 산패(酸敗)된 밥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가정이나 음식점에서 다반사(茶飯事)로 먹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도 '기름이 자르르 흐르던 옛날 밥'을 아련히 기억하지만 지금 밥이 왜 그렇지 못한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른 먹거리가 많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소화흡수율이 가장 높은 식품, 가장 다양한 영양소를 갖고 있는 식품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것입니다.

요즘 채식(菜食)이니 다이어트니 하지만 밥 잘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채식입니다. 쌀이야말로 쌀눈까지 포함하면 영양가가 뛰어난 건강식품이며, 비만 호르몬이라 불리는 인슐린의 분비를 억제하는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합니다.

또 당질이 풍부한 밥은 스태미너의 근원입니다. 운동에너지는 당질과 지방의 연소로 얻어지는데, 당질은 빠르게 연소하고 지방은 느려서 순간적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얻는데도 쌀이 그만입니다.

요즘 마라톤 붐이 일고 있지만, 마라톤에서도 글리코겐 로딩(glycogen loading)이라 해서 시합을 앞두고 쌀밥의 양(量)을 늘리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쌀밥으로 만든 글리코겐은 휘발유, 기름으로 만든 글리코겐은 LPG랄 수 있습니다.

특히 쌀눈은 비타민 B군이 풍부해서, 에너지 대사를 원활하게 해줍니다. 쌀눈이 많은 양질의 밥을 먹으면 엔진오일을 새로 갈고 휘발유를 가득 채운 자동차처럼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댐은 바로 논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만든 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삭은 밥'으로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왜 우리는 삭은 밥을 먹을 수밖에 없을까요?

우선 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단위당 쌀 생산량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품종을 다수확(多收穫) 위주로 개량했기 때문입니다.

다수확종이 질적으로 우수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지만 한술 더 떠서 다수확이 쌀을 남아돌게 해서 삭아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국민의 쌀 소비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서 이런 삭은 밥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쌀 한 섬(145kg)은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한 섬이 70kg대로 줄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50% 이상 1인당 소비량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70년대 이래 국민의 이 같은 소비량 감소에 맞추어서 끈질기게 농부들을 설득해서 생산량을 줄여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은 매년 논의 38%에만 벼를 심어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댐은 바로 논이다. 오리농법을 하는 논에서 오리들이 노닐고 있다.
ⓒ 이종원
그러나 우리는 같은 시기 증산일변도를 고수해 왔습니다. 당연히 고미(古米)가 쌓여서, 학교급식에 몇 년 묵은 고미가 '처리'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일본처럼 수요와 공급이 일치해서, 쌀이 시장에서 정체되지 않고, 또 2kg나 4kg 소단위 포장으로 유통되는 나라에서는 유통과정에서나 가정에서나 산패(酸敗)될 리가 없습니다.

일본은 또 쌀 시장 개방을 앞두고 86년부터 92년까지 6년 동안 이른바 슈퍼라이스 프로젝트(Super Rice Project)를 벌려 최고의 품질의 쌀을 개발, 예정보다 5년이나 앞당겨 1999년 쌀 시장을 개방했습니다. 쌀은 농산물인 동시에 정부정책의 산물이고 그 나라의 문화수준인 것입니다.

수입쌀을 먹으면 될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안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댐은 대청댐이나 소양강댐이 아니라 바로 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농촌 들녘에는 '쌀의 품질 고급화는 질소비료 덜 주기로부터'라는 플래카드가 햇볕에 바랜 채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질소비료를 많이 주었다는 뜻입니다.

벼든 채소든 질소를 주면 잘 자라지만 품질의 저하와 특히 과잉 시비로 인한 질산염의 축적은 환경호르몬 못지않게 나쁜 것입니다. '기생충 김치'가 화학비료로 키운 배추보다 훨씬 건강한 것입니다.

쌀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한마디로 '근대주의자들의 쌀'과 '우리의 한 부분인 쌀'이 현실에서 대립하게 된 상황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일본처럼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삭은 밥'과 아울러 우리 사회의 근대주의적 문제해결 시스템 그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이미 20년을 허송세월했기 때문에 일본처럼 '합리적'으로 해결할 기회를 놓쳐서 이제 쌀 문제는 정부나 농부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변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난다면 여기가 새로운 쌀이 나올 수 있는 곳인 셈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어느 나라보다 먼저 근대주의적 인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과 일치합니다.

쌀을 매개로 생명의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 개인적 실존의 문제를 쌀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은 아주 근본적이긴 하나 지금 우리에게 가장 주요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주요한 것은 앞에서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혼돈과 그 비용을 줄이는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마지막편 '⑧대~한민국의 아이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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