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생명이란 무엇인가? 뭔가 잡힐 듯한 느낌이 10여년을 두고 맴돌더니 어느 날 갑자기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광막한 우주는 인간의 지혜로는 가늠할 길이 없는 신비(神秘)입니다.

가까이 우리 지구만 해도 음속(音速)의 5배 가까운 속도로 자전하면서 다시 태양의 주위를 음속의 85배로 돌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빛조차도 끌어당기고 우주는 광속보다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신비로 가득한 우주지만 우주가 빚는 현상 가운데 생명보다 더 신비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두고 새삼 논쟁이 불붙고 있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이 발 벗고 나섰다는 대목도, 지금 세상을 덮고 있는 대혼돈을 감지한다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김남희
그러나 저들의 결론을 기다릴 것 없이 우주가 빚는 현상(現象) 가운데 가장 신비한 '현상'이 생명의 발생과 진화입니다. 인간을 빅뱅이라는 핵폭발의 낙진(落塵)이라고 간단히 규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꼭 태양의 크기와 에너지를 가진 항성을, 꼭 그만큼 떨어진 괘도로, 꼭 달만한 크기의 위성을 동반해서 도는 행성이 아니면 생명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입니다.

언젠가 읽은 과학 잡지는 또 달의 인력(引力)으로 지구가 23.5도 기울어서 돌기 때문에 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 기후가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조금만 기울기가 달라져도 생명이 절멸한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란 우주의 자기조직화

우주에서 가장 신비한 현상이 생명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주가 생명을 빚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우주 스스로가 자기조직화하고 있는 것, 그것이 생명입니다.

합리주의 논리도 그것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떼야리즘은 벌써 50여 년 전에 생명이 우주의 자기조직화라는 것을 사실상 밝혀냈습니다.

떼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이 우주에는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 이외에 제3의 무한(無限)이 있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무기물, 유기물, 생명의 순으로, 내면에서 무한히 의식의 증대, 집중하고 외면에서 무한히 복잡화하는 진화(進化)가 제3의 무한이라는 것입니다.

헬륨 하나에서 시작한 물질에서부터, 흩어진 여럿이 어떤 힘에 의해서 하나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무기물, 단세포 생물에서 은하계의 별 만큼이나 많은 3천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인간의 뇌에 이르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살아 있는 무한(無限)입니다.

이 제3의 무한, 생명화, 의식화가 바로 우주의 자기조직화, 우주가 생명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떼야르 신부는 그러나 물질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뇌에 이르는 이 제3의 무한(無限)이 곧바로 '우주의 자기조직화'라고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창조의 신을 섬기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증거주의를 금과옥조로 하는 근대합리주의 인류학자로서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조직화라고 하면서도, 거기 다시 신을 빌리는 것은 근대합리주의의 벽입니다. 우주의 자기전개에는 행위자나 원동자(原動者)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떼야르 신부는 그가 말하는 '물질의 의식화'가 종내는 인간의 성화(聖化)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서 끝내 파문(破門)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입론(立論)에 근거하고, 다만 그의 '물질'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주의 총체적 작용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주로 환원함으로써 '우주가 생명으로, 그리고 다시 의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은 우주가 진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우리가 확신하는 바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주의 정화(精華)'라는 전혀 다른 인간이어서, 지금부터라도 거기 맞게 삶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철학의 바탕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학(東學)에서도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 환경단체 회원들이 덕수궁 앞에서 지구환경파괴 주범 미국 부시대통령 규탄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러브 록은 가이아, 지구가 그대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가설을 내 놨습니다. 종래의 생명관(生命觀)으로는 증명해 낼 수 없어서 '가설'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으로서의 지구, 가이아는 지난 20여년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가이아는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은 우주가 생명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가설도 근대합리주의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자신과 세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란 우주가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프리조프 카프라는 그의 <물리학의 도(道)>에서 파동이냐 입자냐를 관찰자가 '관여(關與)'할 수밖에 없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주관과 객관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사물의 궁극적 실체에 대해 동양철학이 찾는 도(道)와 궤(軌)를 같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의 도나 현대물리학의 '관여'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애당초 우주와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現象)이며 나라는 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주의 자기조직화다'라는 입장에 서면 존재를 굳이 현상이나 망상으로 몰아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명상(冥想)의 부단한 수련으로 '몰아(沒我)의 경지', 주관과 객관의 일치로 나간다고 하지만 아무리 명상을 해도 생각의 주체(主體), 내가 있어서는 나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그러나 '나는 우주의 자기조직화다'라는 논리(論理)를 통한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간명합니다.

필자는 지난해 간암, 그것도 발견한 뒤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간내 담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7월 한 달을 갖가지 병원 검사에 시달리면서 '나는 내가 아니라 우주의 자기조직화다'를 주문처럼 되풀이, 죽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두 달 여를 괴롭힌 황달 수치와 암 수치가 정상으로 반전되었습니다. 극적인 상황의 절박성이 밀어 붙여서 그와 같은 확신을 체화(體化)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매환자는 육체적으로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나에게서 육체가 놓여나면서 내 몸이 자기논리를 관철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정신과 육체를 갈라놓는 것은 우주의 발현으로서의 나를 왜곡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세계화, 지구 전체의 조직화

좌망(坐忘), 도가(道家)에서는 앉아서 모든 것을 잊으라고 합니다. 길은 거기밖에 없습니다.

깊은 생각, 무슨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억지로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근대합리주의와 종교가 겹겹이 막아서지만, 쾌도난마(快刀亂麻)로, '나는 내가 아니고 우주가 생명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규정하면 머리를 비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서 드디어 자아가 망상임을 깨닫는 상태, 그 경지를 넘어 서면 마침내 시공(時空)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깨달음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시공(時空)을 벗어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무한대나 무한소의 세상이 보여주는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를 의식이, 우주의 발현(發顯)인 우리 두뇌가 시현(示顯)해 내는 것입니다.

은하계의 별만큼이나 많은 3천억 개의 뇌세포 가운데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것은 10%도 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이를 위해 예비(豫備)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인지 모릅니다.

제도권에서는 무시하고 있지만 요즘도 샤머니즘이 횡행합니다. 이 '신내림'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환상 속에서 미래를 보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근대주의는 물론 이를 일소에 붙이지만 거기서 중요한 가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꿈이라든가 환상 속에서 '누군가'가 크든 작든 뭔가를 일러 주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면 그 누군가가 알려 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자중에는 스스로 환각제를 복용하고 환상 속에 들어간다든가, 최면상태에서 신내림 같은, 의식의 확장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나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면 그 같은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태란 없다'라고 앞서 가는 현대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누구에게나 그런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근대합리주의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선 밖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신내림이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나면 의식은 독립적인 실체(實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깨달음의 논리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뿌리 채 삼제(芟除)하지 않고서는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지만 그러나 '만들어 가는 의지'는 이들과는 전혀 관계없이 궁극적인 의식화를 향한 되풀이, 파도가 되풀이 모래를 쌓아 올리듯 우주의 울림과 거기 공명하는 생명현상의 끝없는 되풀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전북 새만금 방조제 위로 해가 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떼야르 신부는 '사람의 세계화, 지구 전체의 조직화'라는 명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세계화, 조직화'가 끝내는 흩어진 여럿을 하나로 모아 '큰 하나', '한 생명'이라는 마지막 임계점, 오메가 포인트를 돌파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상, 글자 그대로 '사람이 세계화'하고, 지구 전체가 유기적인 하나라는 인식이 일반화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본다면 그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과 50년 동안에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의 세계화야말로 요즘 말하는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지구 전체의 조직화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도저히 떼야르가 말하는 '큰 하나' '분자로서의 인간'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원자를 보고 분자를 가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분자는 원자의 합(合) 이상이고 부분의 합이 전체는 아닙니다. 산소와 수소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 물은 없습니다.

떼야리즘은 그러나 그 하나됨이 '사랑이라는 역학(力學)'으로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자를 분자로 만드는 힘은 현대과학이 알지 못하지만 사랑이 끝내 '큰 하나'를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굉장한 자연의 힘이며 진화에의 의지이며 우주 밑바닥에서 나오는 울림이며 개체를 전체로 몰아가는 열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50여년 전의 떼야르 신부는 그러나 인류가 어떻게 사랑을 안아낼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고심(苦心)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회의 구성원리가 되는 '사랑의 패러다임' 세상, 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리는 원자다, 원자는 분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오메가 포인트라고 말하는 임계(臨界)점을 넘어 서면, 마치 물질에서 임계점을 넘어 생명이 나왔듯이 '분자로서의 인간'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징(明澄)하게 추론했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⑦만들어가는 의지의 공부길 ⑧대~한민국의 아이디 등의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