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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적 만들기'가 펼쳐지면서 이 땅에 새삼 '분단(分斷)체제'의 논리를 다시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상현실'은 바로 이 '분단체제'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는 한반도에는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체제 아래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국가'라기보다는 '두 개의 반쪽국가'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데서 정통성을 구하는, '적대 의존 체제'가 분단체제, 분단역학입니다. 남북이 서로 적이 돼줘서, '호상(互相)간에!' 체제를 유지해 올 수 있었고 경제도 제가끔 미·일이나 중ㆍ소와 연결되어서 밑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 남북은 적대의존을 통해 서로의 체제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미ㆍ소간의 냉전이 바로 이 적대의존의 연원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적대하는 것은, 이념이라는 껍데기를 벗기면, 실제로는 자기영향권을 확보,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미ㆍ소에 의한 세계지배, 이른바 팍스 루소 아메리카나(PAX RUSSO-AMERICANA)의 참 뜻이 적대의존(敵對依存) 그것입니다. 미ㆍ소가 다른 나라들을 나누어 지배하는 '국제정치'가 한 나라를 두 동강 낸 저들의 '전진기지(前進基地)'에서 백성을 둘로 나눠 지배하는 것이 우리 분단체제이고,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반쪽국가'입니다.

어떤 국가든 국가라는 개념 자체는 반드시 적의 존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적이 있어야 국가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이렇게 국가의 본질 속에 깊숙이 은폐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의 '적'과는 다릅니다. '금강산 댐' '북풍' 등으로 수시로 출몰하면서 늘 현실의 정치경제를 간섭, 우리 생활을 지배해온 적입니다.

북쪽에서 주한미군의 존재가 '대를 이은 독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남쪽에서 베트남전 패배 이후 미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단 한 마디가 잔혹한 유신독재로 나타난 것이 모두 분단역학입니다.

마치 자석과 같아서, 지난 반세기, 그 자장(磁場)에 남과 북의 우리 백성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있는 것이 분단체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원리를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냉전의 와해로 밖에서 강요한 그 역학이 이미 수명을 다해 가는데도 오히려 갖은 수단을 다해 북은 핵 개발로, 남은 '보혁구도'로 기를 쓰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는 형국입니다. 실로 참담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분단체제의 남쪽 운영주체는 '보수언론'

북은 여전히 김정일 권력이 이 분단체제라는 시스템의 운영주체지만 남쪽은 이제는 권력대신 이른바 ' 보수언론'이 그 주체입니다. 조선ㆍ동아들이 이 시스템을 주도하고 한겨레, 참여연대들이 이들 반대편에 서 있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비유컨대 마치 달이 지구를 따라 돌 듯, 한겨레 등의 잡아당김이 오히려 구도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도 적대의존의 논리입니다. 분단체제, 말을 바꾸면, '하나의 체제'인 남과 북을 동시에 부정하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적대의존의 역학요소로 혼돈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론은 태생적으로 권력입니다. 일제가 3ㆍ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영국식 식민지 간접통치방식으로 일부 전환하면서 동아ㆍ조선 등이 태어났습니다. 식민지 간접통치 체제였던 것입니다.

해방 후 동아와 한 뿌리인 한민당이 정권 수립을 주도했고, 유신에 한때 저항했지만 이내 그 홍보기능을 담당, 독재체제의 없는 정통성을 있는 것으로 부단히 상징조작을 하면서 '정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6ㆍ29선언, 독재에서 보수대연합으로의 권력이동 과정에서 이들 언론은 언론이라기보다는 '정치실세'로 변했습니다. 언론이 가상현실을 운영하는 틀, 초정당구조(超政黨構造)가 되면서 YS든 DJ든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 우리 언론은 태생적으로 권력이다. 멀리 청와대를 바라보며 세종로를 가운데 놓고 왼쪽에는 조선일보사(유리벽 건물), 오른쪽에는 동아일보사가 위치해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체제는, JP를 끌어들인 DJ와는 달리, YS 이래의 보수대연합(언론을 포함한)을 승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체제언론은 '보혁구도'를 만들어 싸움을 계속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노 체제도 언론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모두 집권 후반기에만 들어가면 줄줄이 '식물대통령'이 되고 마는 것은 '정치를 하는 언론' 탓만은 아닙니다. 분단체제의 와해 논리와 대혼돈을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무튼 북한체제는 지금 핵과 대미적대정책을 포기하고도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부시도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체니가 스캔들에 휘말려 무력화되고 대통령 지지도가 역대 최하인 데다가 곧 팽대한 무역적자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북한 적 만들기 게임은 시들해질 것입니다.

이로 인한 분단역학의 와해는 남쪽에서는 정치대란(政治大亂)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벌써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이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한쪽이 지쳐서 줄을 놓으면 이긴 쪽도 뒤로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노무현 체제의 대연정 제의는 줄다리기, 보혁구도가 앞으로 맥이 빠질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유신독재에서 보수대연합, 그리고 이른바 '보혁구도' 그 다음은 무엇이 나타날까요? 아마도 다음 대선(大選)에서는 '망국(亡國)적인' 지역주의가 나라를 다시 동서로 가르면서 권력 자체의 약화와 맞물리면서 체제가 무너지는 정치대란(政治大亂)이 본격화할 것입니다.

남북대립이 여전하던 YS나 DJ시대에는 이른바 지역정서를 정치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대립이 없는 지역간 대립의 정치는,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우리 민족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정치대란, 본격적인 정통성 위기로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과 북에서 이렇게 대변화에 끌려가면서 예의 '분단체제', 한반도의 반도적(半國的) 설정, 가상현실이 붕괴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 건너 불이 아니어서 그 혼돈 비용은 우리 백성들이 지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사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경제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정치도 참으로 남과 다른 나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는 더 크게, 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소설가 장용학 선생은 우리 한반도를 독특한 상황인식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ㆍ로마에서 출발한 서구문명이 한 갈래는 프랑스ㆍ영국ㆍ미국을 거쳐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독일ㆍ소련을 거치면서 평등이라는 아름으로 이 땅에 들어와 서로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주의 자체의 모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는 애당초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반대편으로 지구를 돌아 하필 이 땅에서 맞부딪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80년대 제3세계이론으로 유명했던 사미르 아민은 주변이 중심이 되는 역사의 운동법칙을 개진한 적이 있습니다. 봉건주의가 가장 융성해서 당시 세계에서 인구 백만 이상의 도시 열 곳 가운데 아홉 군데가 중국에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유럽에서도 변두리인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강대국 영국이나 독일이 아니라 북쪽 변두리에 불과한 러시아에서 나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변두리가 중심이 되는 것이라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300년에 걸쳐서 이룩한 근대화가 우리에게는 단 50년에 휩쓸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 변두리가 중심이 된다. 한반도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한 세기 근대화가 유린하듯 휩쓸어 가면서 우리가 당한 고통과 치욕 그리고 모순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로 역사의 주름에서 응축된 에너지가 지금부터 이 땅을 '세계사의 중심'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바꾸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그 대가입니다. 베트남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현대사의 한 축을 이뤘지만 그것은 베트남 민중에게는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의 두 가치(價値)가 부딪치면서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을 압도한다든가 타협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로 전화(轉化)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화(轉化)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고통뿐이어서는 안 되며 우리들 백성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더 이상 깔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서, 고통이 그것을 강제하기 전에 맞불, 우리가 그것을 실현해 가는 것일 것입니다. 낡은 가치의 꼭두각시이기를 거부하고 대변화의 지향을 알아내서 스스로 변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역사를 만드는 일입니다

'천 할아버지에 한 손자만 남는다'

문제는 예의 '다음 국면'입니다. 적을 잃은 미국이 연간 6천억 달러가 넘는 팽대(膨大)한 무역적자를 안은 채 중국과 파워게임에 골몰하고, 이른바 '세계자본시장'이 이들의 파워게임을 먹이로 다시 머니게임을 벌이는 다음 국면(북한체제가 무너지고 남쪽의 정치ㆍ경제가 표류하는, 남과 북에서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정치ㆍ경제 틀'이 깨지면서 통일이 사변(事變)으로 오는 대혼돈)을 대비하는 길은 없을까요?

연전에 미국 국방성에서 나왔다는 <펜타곤 리포트>는 이 다음 국면을 대비하는 문제와 관련,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내에 급격한 기후 변화로 식량, 물, 에너지 등의 자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 들 때까지 전쟁과 기아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 할아버지에 한 손자만 남는다'는 우리 전래(傳來)의 후천개벽(後天開闢)에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대목이 엉뚱합니다. 이런 문명 파괴적인 재앙을 예견하면서도, "특히 엄청난 인구의 중국이 식량 물 에너지 부족으로 대재앙에 함몰할 것"이며, 여기 연유한 전쟁이나 전쟁 준비가 "테러보다 훨씬 제어하기 힘들 것이 분명해서" 앞으로 미국의 그럴듯한 적이 될 것이라는 설정입니다. 일테면 새로운 버전의 황화론(黃禍論)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 들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마치 핵전쟁이라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보자(think about unthinkable)'던 지난 시대 핵전략처럼 무자비합니다.

▲ 중국의 사막화는 현재진행형이다. 한국 황사 현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중국 마오우쑤 사막의 북부 모습.
ⓒ 조창완
재앙에서조차 적을 찾는 것이 저들의 국가주의입니다. 그것을 도덕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바로 이들 현대 공룡들의 이런 속성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근대국가의 와해를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굳이 부연한다면 근대합리주의체제는 환경재앙을 군사적으로 활용한다는 식으로, 과잉이든 적의 부재든 환경재앙이든 모두 자기 틀 안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패러다임 시프트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주의적 가치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면 그 문제를 왜곡해서 키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恐龍)과 다름없게 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 도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향을 잃고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게 되어 가는 공룡에 대항해서 살아남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의 다음 국면, 아마도 베이징올림픽이 끝나면서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이 정치ㆍ경제적으로 나라 안팎에서 제동이 걸리게 되면서 '식량과 물 에너지 부족으로 재앙에 함몰'하고 그 불똥이 세계를 태우게 될 2008년에서부터 환경재앙이 본격적으로 엄습하는 2020년까지가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펜타곤의 원망과는 달리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요즘도 간혹 본질에서 기아의 문제인 후진국 사태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일삼는 '왜곡'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문제 자체를 키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20년, 이런 '왜곡'이 중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황'과 환경재앙이 동반, 심화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IMF같은 사태와 국가의 와해라는 정치ㆍ경제적 위기구조에서 환경재앙 쪽으로 위기가 '전화'해 가는 구도입니다.

이 전개를 마디마디 정확히 예측하고 거기 대응해야 합니다. 그것도 앞으로 3, 4년 후 정치ㆍ경제적 대혼란이 덮치기 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키를 돌려놓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⑤사랑의 패러다임 ⑥나는 알았네 생명! ⑦만들어가는 의지의 공부길 ⑧대~한민국의 아이디 등의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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