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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삶 속에서 바둑이 차지하는 무게는 상당하다. 기력은 현재 아마추어 3,4단 정도밖에 안 되지만 유일한 특기가 바둑이기 때문이다. 입문한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수많은 바둑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 간간히,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오마이뉴스>의 사는이야기를 통해 바둑 추억을 더듬는 작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바둑을 통해 만난 사람들 가운데 절대 잊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섯 꼭지만 올리겠노라 약속한, 남은 두 꼭지를 통해 내 가슴 한 구석을 시리게 만들었던 두 사람에 대해 쓰기로 한다.

이번 꼭지의 주인공은 '안필용씨'다. 지금은 이순이 훨씬 넘으셨을 안씨 아저씨. 1990년, '의왕기원'에서 원장님을 통해 처음 만난 그는 일본에서 노동으로 돈을 번 뒤, 한국에 와서 서너 달 쉬다가 다시 돌아가는,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활을 하던 기인(?)이었다. 노동이 직업이었지만, 기품 있는 말씨와 행장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느끼게 했다. 묘한 흡인력이었다.

무슨 끈이 닿아 일본과 한국을 아래 윗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지는 몰랐다. 어쨌거나 뵐 때마다 나는 늘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당시 나는, 젊고 싱싱한(?)한 데다 인기도 웬만한 총각 강사였기에 바빴으므로, 주말이 아니고야 그 좋아하는 바둑 구경 한 번 제대로 할 수 있는 짬이 없었다. 그는,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내 꿈 속 날개였다.

아저씨는 한국에 오실 때마다 한 달 정도는 꼭 의왕기원에 나타나 살다시피했는데 방내기 상대로는 원장님과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절대 바둑을 두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든 연락을 해왔고, 나를 만나지 않고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잘 해드리기는커녕 날름날름 돈만 따 먹는 나를 왜 그리 찾았는지….

빳빳한 만 엔짜리 지폐를 바둑판 밑에 묻고 시작하는 그와의 방내기는 짜릿하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전율을 느끼게 했다. 치수는 내게 두 점이었는데 계가로 끝나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방내기가 아닌 '무지방'이라는 종류의 무식한 방내기였으므로 열 여덟, 아홉 방 정도는 흔하게 터졌다. 가끔은 나를 이만 방으로 쓰러트릴 정도로 주먹심이 무시무시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마지두에 널브러져 뒹굴기 다반사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주말 수업이 잡혀 아저씨가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기원에 갈 수 없는 날이었다. 느닷없이 안씨 아저씨가 학원으로 쳐들어오신 게 아닌가. 수업이 끝난 뒤 누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원장실에 가보니 아저씨였다. 하필 내가 80분짜리 수업 중이라 아마 원장님이 맞으신 모양이었다. 아이들 나눠주라고 고급 빵이며 과일에 음료수까지, 얼마나 많이 샀으면 배달까지 시켜 바리바리 들고 오신 것까지는 좋았다.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 찾아오신 게 좀 그랬지만 대취하신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원장님과 단둘이 나눈 대화다. 그 다음 날 원장실에 호출로 불려간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 선생! 개인성향이야 탓할 게 못 되니까 뭐…. 그렇지만 예민한 아이들을 매일 만나야 하는 선생으로서는 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이 선생…, 어제 오신 분과 사귀나?"

아저씨에게 대판 대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아저씨, 대체 원장님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신 거예요? 대낮부터 술에 취하셔서…."
"취하기는 내가 뭘?"
"저랑 친구라고 하셨다면서요?"
"맞잖아, 바둑친구."
"끈끈하게 사귀는 사이라고도 하셨다면서요?"
"맞잖아, 바둑으로 끈끈하게 사귀는 친구."
"원장님은 지금 우리가 이상하게 사귀는 줄 아신단 말예요."
"이상하게? 어떻게 이상하게?"
"호몬줄 아신다고요! 아이, 나 참 정말 기가 막혀서…."
"호모라니, 너랑 나랑?"
"그래요, 호모! 아저씨랑 저랑."
"에이 말도 안 돼. 그 사람 눈이 뭐 잘 못 된 거지…, 어떻게 너랑 나랑 호모로 보냐?"
"본 게 아니고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 하셨잖아요?"
"그게 어떻게 그런 뜻이 돼? 나 원 참! 동환이, 국어선생 맞아?"
"……."

우리말을 잘 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그 쓰임마다 묘하게 풍길 수 있는 느낌을 알지 못했던 아저씨가 고지식하게 '바둑으로 시작해서 끈끈하게 사귀는 친구 사이' 어쩌고 하셨으니 원장님이 곡해하신 일은 당연했다. 어쩌랴? '끈끈하다'는 말과 '사귄다'는 말이 그런 뜻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아저씨를 붙들고 끝까지 화만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랑이 끝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파주의 '감악산', 그 맑은 계곡에 의왕기원 원장님과 셋이 소주와 삼겹살, 그리고 바둑판을 들고 올라 절에다 짐을 풀고 2박 3일 취중천국에 빠진 적이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뒤, 그 물을 떠 마시고 새소리에 화답하며 술 따르는 소리와 바둑돌 떨어지는 소리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일본에서 태어난 아저씨는 해방과 함께 홀아버지 등에 업혀 귀국했다. 6·25 동란이 끝날 무렵,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고 월북했다. 졸지에 천둥벌거숭이가 된 그는 여기저기 돌멩이처럼 구르며 모진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난 늘…, 고아야!"

소주잔에 담아내던 아저씨의 한숨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1993년 가을, 나는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저 이제 곧 결혼해요."
"그래? 잘 됐다. 홀어머니께 효도하게 생겼구나. 나도 어쩌면 이번에 돌아간 뒤 다신 안 올지 몰라."
"왜요?"
"모르겠어. 일본이 더 편해. 그냥…."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의왕기원 원장님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이 왔다. 내 결혼식에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일이 있었다며 안씨 아저씨는 원장님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봉투를 내민 뒤, 송별식까지 하고는 일본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봉투 속에는 서툰 글씨체로, 가슴 뭉클한 몇 마디를 적은 편지와 함께 잉크냄새마저 처연한 만 엔짜리 지폐 열 장이 들어있었다.

그것이 안필용 아저씨와 마지막이었다. 일본 땅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지, 노구를 편히 뉘일 땅 한 평은 장만하셨는지, 한 번만이라도 꼭, 안씨 아저씨가 보고 싶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덧붙이는 글 | -<나의 추억 나의 바둑 기사> 다섯 꼭지 가운데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픈 추억일지라도 그 한 자락은 향기롭기 마련입니다. <오마이뉴스> 섹션의 '사는 이야기'라는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인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도 젊습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들을 추슬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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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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