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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을 도끼로 찍어내시던 아버지

한국 바둑계에는 기인이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프로기사들 가운데도 기인으로 꼽히는 사범들이 꽤 된다. 물론 이제는 신화가 된 사람들이다. 이른바 관철동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바둑계 기인들도 사라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행과 전설마저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

<나의 추억 나의 바둑> 다섯 꼭지 가운데 마지막 편인 이글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전영선 사범 이야기를 옮겨 볼까 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바둑계에서 술에 관한한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 힘든 철학(?)을 선보이며 기인으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잉걸 아빠가 만나 본 프로기사들 가운데 가장 소탈한 사람이었다.

전영선 사범은 독특한 바둑 색깔로 아마추어 시절부터 내기바둑의 달인이었다. 내기바둑꾼들에게는 당연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분전투, 수 만들기, 사활(死活)에 아주 강했다.

프로세계에 들어와서도 그는 동료 기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전류(田流)'라는 별명은 바로 동료들이 지어준 것이다. 전류란, '급소와 맥을 짚어 상대를 순식간에 꼼짝 못하게 하는 수법'을 일컫는다.

이창호의 스승으로만 알려진 사람

그는 한국 바둑의 대들보 이창호 9단의 스승이었다. 물론 이창호 9단은 어린 시절에 고향인 전주에서 아마추어 강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천재를 아무도 감당하지 못했다. 이창호의 부친 이재룡씨는 프로기사 가운데 스승을 모시고자 동분서주했고 흔쾌히 수락한 이가 동향(同鄕)인 전영선 사범이었다.

서울에 살던 전 사범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 전주로 내려가 이창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창호에게 자신의 섬광과도 같은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동료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자신만의 독기까지도 전수했다.

이창호는 빠르게 성장했다. 전영선 사범은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설마 저 아이가 천재? 그랬는데 어느새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치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지"하며 그 때를 회상하곤 했다.

누구에게 이창호를 맡길 것인가를 고민하던 전 사범은 세계바둑황제요, 전신(戰神)인 조훈현 9단에게 간곡한 청을 넣기 시작했다. 황제 자리를 수성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조훈현 9단이 제자를 들일 리 없었다. 그러나 결국 전 사범의 독기가 조훈현으로 하여금 소년 이창호를 받아들이게 하고야 말았다.

팬들에게 언제나 후덕했던 진정한 프로 사범 전영선

내가 전영선 사범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봄, 관철동 한국기원에서였다. 당시, 종로인쇄골목에 볼 일이 많던 나는 가끔 한국기원에 들러 사범들에게 지도대국을 청해 프로의 '매운 맛'을 보는 게 새로운 취미였다.

잉걸 아빠는 프로 사범들에게 다섯 점의 치석을 놓고 배웠는데 가장 매운 주먹의 소유자는 전영선 사범이었다. 전혀 수가 안 날 것 같은 곳에서 칼날을 들이대던 그 섬뜩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자연스레 전영선 사범만을 찾게 되었고 친분이 쌓이게 되었다. 어느 날, 1층 계단에서 만난 그는 다짜고짜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하고만 바둑 둘 거면, 굳이 지도 대국료 낼 필요 없어. 이 선생 그렇게 돈 많이 벌어? 비싼 돈 내고 시간 날 때마다 지도 대국 받는 사람들은 거의 다 돈 걱정 없는 사장님들이야."
"그럼 어떻게 해요?"
"나랑 바둑 두고 싶으면 ○○기원으로 와! 전화해서 나 있으면 언제든지 와! 이제부터 이 선생한테는 지도 대국료 안 받을 거야."
"네? 에이, 그럴 수야 없죠."
"그냥 이 선생은 소주만 한 잔씩 사면 돼."

나중에 알고 보니 잉걸 아빠만 전 사범에게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장님'이 아닌 서민 팬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항상 지도 대국을 베풀었던 것이다.

쌍권총으로 세상을 겨눈 사나이

전영선 사범의 진짜 별명은 '쌍권총'이다. 바지 뒷주머니 양쪽에 한 병씩 소주병을 넣고 다녔던 젊은 시절에 붙여진 별호다. 그만큼 그는 술을 좋아했다. 소박한 안주에 소주 몇 잔만 대접하면 소년처럼 맑은 얼굴로 행복해 했다. 잉걸 아빠도 술! 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전 사범은 진짜 고수였다. 애주가 차원을 넘어 거의 주신(酒神) 수준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잉걸 아빠 앞에서 휘청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 년 정도 뵙다가 결국은 대작에 지쳐 떨어진 잉걸 아빠와 헤어지고 말았는데 어쨌든 인연이었을까. 1996년 10월, 전 사범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당동 하이텔기원에서였다.

유니텔바둑동호회 바깥 모임에 참석하려고 하이텔기원을 처음 찾은 나는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기원 맨 안쪽 자리에서 전 사범이 지도대국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팔짱 낀 채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몰라 볼 정도로 수척해진 것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이 선생?"
"기억 하시겠어요?"
"그럼! 아직 나 기억력 괜찮아.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 반가워라."
"정말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바둑 언제 끝나세요?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됐는데 한 잔은, 딱 한 잔만! 하셔야죠?"
"나, 술 끊었어."
"정말이세요?"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있다 나왔어. 의사가 나더러 더 이상 술 마시면 죽는대."

마치 다른 사람 얘기 하듯 전 사범은 씩, 웃어 보이며 꽉 쥔 내 손을 마구 흔들었다. 더 이상 술 마시면 죽는대, 하더니 전 사범은 그날 저녁 나를 방배동포장마차촌으로 끌고 갔다.

"이 선생은 술 마시고, 나는 물로 건배하고."
"그나저나 사당동은 어쩐 일이세요?"
"나 지금은 이 동네 살아. 저기 윗동네."
"그러셨구나. 가족 모두요?"
"가족 뭐 있나? 어린 딸내미하고 집사람하고 그렇게 셋이지."

그 좋아하는 술을 끊다니,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네 시간이나 함께 있다가 헤어질 때까지 술병은 쳐다 보지도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쌍권총이 결국은 전영선 자신을 겨누다

우리는 서로가 따로 처한 이런저런 어려움과 '살아가기 바쁨' 때문에 의왕시와 사당동이라는 지척을 두고서도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다. 이창호 9단의 스승이라는 유명세(?)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으므로 소식은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몇 차례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큰 수술을 받고 회복되는가 싶더니 끝내 2002년 2월에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결국에는 젊어서 너무 마신 술 때문이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인터넷바둑 사이트에서 지도대국을 두었다고 하니, 정말 바둑과 팬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천상에 가면 아무리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 몸은 절대 다치지 않는 술이 있다는데 정말일까?"
"있다면요?"
"정말 있다면 어떻게든 가져오고 싶어."
"가져오면요?"
"사람은 참 좋은데 나처럼 술 때문에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싶어. 그리고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이 힘든 세상 도저히 살아가기 벅찬 사람들에게도 막 퍼주고 말이야. 물론 나도 맘 놓고 마시게. 하하하!"

덧붙이는 글 | <나의 추억 나의 바둑> 다섯 꼭지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픈 추억일지라도 그 한 자락은 향기롭기 마련입니다. <오마이뉴스> 섹션의 '사는 이야기'라는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인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도 젊습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들을 추슬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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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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