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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기원에 들락거리던 시절, 방내기(돈내기 바둑의 일종)는 거의 일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내기를 안 한 지도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연인의 향기로운 입술처럼 온 몸을 불콰하게 달구던 방내기의 짜릿함. 바둑판 밑에 깔려 속삭이던 만 원짜리 지폐 뭉치의 알싸한 유혹. 그 초긴장을 잊고 산 지 벌써 그렇게 되었다니 나 자신이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방내기를 영영 접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한…….

경기도 군포시, 구 사거리에는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호○기원'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공배(가명)씨를 만났다. 공배씨는 시장 통에 꽤 큰 상점을 여러 개 갖고 있는 알부자였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바둑이었다.

그런데 기원에 모이는 손님들 중 그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왕소금인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매너가 '꽝'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오십 조금 넘은 위세에 아무한테나 반말을 찍찍 갈겨대며 새롱거리는 성미 탓이었다.

주로 하수들과만 방내기를 두면서 신출들에게 급수를 속이기 일쑤고, 조금 잃을라치면 앓는 소리, 온갖 인상, 갖은 앙살을 오물 쏟듯 퍼부으니 누구든 못 견딜 일이었다. '나, 먹고 죽을래두 돈 없어!' 하며 몇 만 원 정도 떼어 먹는 것은 차라리 애교였다.

나는 처음부터 그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좀체 상대를 구하지 못한 그가 한 판도 겨뤄보지 못한 나를 그냥 둘리 만무였다. 나만 봤다하면 '어이, 이 선생! 나랑 한 판 어때?' 어쩌고 하면서 엉너리를 쳐대니 모른 척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그 기원에서 방내기 5급(사실은 소금보다 짠 4급), 나는 3급이었다.

치수는 내게 정선이 딱 맞았다. 그러나 욕심 사나운 그의 바둑은 항상 무리수 일색이었고, 치수고치기 겸으로 두다보니 때로는 그를 넉 점까지 접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와 맞닥뜨리는 일이 싫어 기원 발길을 좀 끊으면 집으로까지 전화를 해왔다.

"아이, 이 선생, 보구 싶어 미치겠어, 흐흐! 한 번 나와. 총각이 뭘 그렇게 바빠?"

늘 그런 식이었다.

어느 주말, 역시 전화에 시달리다 못해 불려 나간 나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그와의 방내기에 빠지고 말았다. 맥없이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들이 어지럽게 오가는 동안 어느덧 새벽이 되었고, 나는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따고 있었다.

그의 형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귀밑과 꼭뒤로는 개기름인지 땀인지 모를 육수가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체력이 이미 바닥 난 그였지만 좀체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나야 뭐,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의 청년인지라, 하루 이틀 밤샘쯤이야 잠자는 처녀 입술 훔치기였다.

"우리, 마지막 엎어치기 한 판으로 하지! 어때?"

잃은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그의 성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차라리 잘 됐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마지막 판은 공제 없이 그가 내게 두 점이었다.

바둑판 밑에는, 처참하게 널브러져 내게 항복했던 만 원짜리 뭉치와 그가 묻은 수표 한 장 등, 이백 만원이 넘는 액수가 헐떡이고 있었다. 봐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참에 돈 좀 있다고 으스대는 그의 오만한 콧날을 보란 듯 뭉개버리리라!

마지막 판만큼은 그도 진지했다.

300여 수를 넘기고, 이제 바둑은 한두 집짜리 끝내기만을 남기고 있었다.

수십 번도 더 계가를 해본 나는 백의 두 집 승을 확인한 뒤였다. 서로 수십 개씩 사석을 잡고 있었지만 결국엔 미세한 승부가 된 셈이었다. 남은 끝내기라야 모두 맞보기였으므로 순서야 어찌됐든 백의 두 집 승리는 불변이었다. 그야말로 이제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해도 뒤집힐 형국이 아니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바둑 두는 내내 부러 외면했던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십 리도 더 들어간 눈두덩, 핏기가 가신 볼 살은 잿빛 기름과 함께 광대뼈 밑으로 흘러내렸고, 황달기가 도는 흰자위는 말라버리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그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오십 줄에 돈이 없나, 자식이 없나, 마누라가 없나, 왜 저 모양으로 살까?

웬만한 부자는 축에도 안 껴줄 만큼 큰 부자인 그가, 허구한 날 기원에서 하수들 등이나 치고, 푼돈 댓 냥에 목숨 걸어 젊은이들한테 욕이나 먹고 사는 품새라니, 그런 그를 상대하고 있는 나 자신까지도 처량했다.

"갑자기 배가 고프군! 컵라면이나 좀 먹을까?"
"끓여드려요?"

다른 때 같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나는 군소리 없이 컵라면을 준비해 그에게 건넸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인생마저 포기한 듯 넋을 놓던 그의 상판을 보고 있자니 차마 '끓여 드세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미안하지만……, 커피 한 잔만 더 부탁해도 될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커피를 타러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좀체, 몇 군데 남지 않은 끝내기를 차마 못하겠다는 듯, 딴 짓만 해대던 그의 손길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둑판 밑에서 가파른 숨을 고르던 지폐들도 일제히 고개를 곧추 세웠다. 사석들이 다시 바둑판에 채워지고 흑과 백의 경계가 사이좋게 그어진 뒤, 확인할 일은 결과밖에 없었다. 언뜻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본 듯도 하다.

이……, 이럴 수가!

뜻밖에도 결과는 흑의 한 집 승리였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수십 번도 더 계가를 했는데, 그럼 내 계가가 틀렸다는 말인가?

"아, 정말 힘든 판이었어. 하하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판이야, 하하하!"

몇 분전까지만 해도 거의 죽을상이었던 그의 입이 귀까지 걸리면서 고춧가루가 잔뜩 묻은 금니들이 번쩍였다. 내가 잠시 멍한 사이, 서둘러 바둑판 밑에 묻어둔 돈뭉치를 꺼내려는 그의 손목을 내가 잡아 챈 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복기해 봅시다!"

"뭐라구, 복기?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지고도 치사하게 승복 못하겠다는 거야?"

"아니요! 이 판은 제가 이겼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두 집 이긴 바둑이라고요."

"너……, 너, 정말 이럴 거야? 누가 이겼다구? 돈에 환장 들려 미, 미친 거 아냐?"

돈에 환장, 어쩌고 하는 말에 나는 정수리가 터지고 말았다. 따돌림 당하면서도 정신 못 차리는 인생이 때로는 안쓰러워 상대해줬고, 이깟 방내기에 그깟 돈,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차라리 개평 어쩌고 하면 얼마 쯤 던질 요량이었다. 그런데 뭐라? 날더러 돈에 환장이 들렸다고?

옥신각신, 단 둘 밖에 없던 실내가 시끄러워지자 골방에서 마작하느라 밤샘을 하던 원장님과 사람들이 와락 쏟아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뭔데 그래? 생전 이 선생 소리 높이는 거 본 적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기가 막혀 샅이 오그라들 판이었지만, 숨을 고르며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복기해보면 되겠네. 서로 수순에 문제가 없다면 당연히, 흑 한 집 승이든, 백 두 집 승이든, 둘 중 하나로만 결과가 나올 거 아냐? 그도 저도 아니면 둘 다 거짓말을 했던가, 안 그래?"

원장님은 단호한 판정을 내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개소리야? 다 끝나서 내가 한 집 이긴 걸루 결과가 나왔는데, 자……, 여기 집 세어봐! 내 말 틀렸나."

"복기하는데 일 년이 걸리우, 이 년이 걸리우? 싸울 일이 아니잖수?"

원장님의 말씀도 공배씨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이 선생 너, 그렇게 안 봤더니 영 싸가지 없구나, 아들 벌밖에 안 되는 놈이, 배웠다는 놈이, 깐에는 점잖아 보여 귀애했더니 이제 와서 등을 쳐? 등쳐먹을 데가 그렇게 없더냐?' 어쩌고, 그르렁, 악다구니에 발악까지 더하는 것이었다.

내가 더 이상 수모를 견디기 힘들어 그만 됐다고 손사래를 막 치려는데,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다. 돌아보니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튀어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웨걱! 하더니 그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철퍼덕! 하고 기원 바닥에 쏟아진 라면과 그밖에 먹은 것들이 위액에 불어 역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원장님은 덩달아 웩웩거리며 화장실로 향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공배씨는 탈진한 듯 토사물 옆에 널브러졌고, 나는 그만 차마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손가락처럼 불은 라면과 토사물 위에, 마치 무슨 건포도 고명처럼 박힌 까만 바둑돌 세 개!

코 막기에만 바빴던 사람들도, 화장실에서 막 나온 원장님도, 모두 기가 막혀 서로의 얼굴만 훑을 뿐 할 말들을 잊은 표정이었다.

진상은 이랬다.

내가 커피를 타기 위해 싱크대로 가 잠시 등을 돌린 순간, 그가 내 사석 세 개를 훔친 것이었다. 주머니에 넣자니 나중에 뒤져 보잘 일이 걱정, 다른 통에 넣자니 쥐죽은 듯 고요한 새벽에 돌 떨어지는 소리를 어쩔 것이며, 에라, 모르겠다! 입에 처넣고는 그만 꿀꺽 삼키고 만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승복 못하는 나와 실랑이를 하면서 핏대를 올린 게 화근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 혈압이 높던 공배씨는 식도에 훈장(?)처럼 걸려있던 바둑돌을 내릴 새도 없이 그만 다 쏟아 내버리고 만 것이었다.

"미, 미, 미안해!"

끌리는 듯한 쇳소리가 오물로 범벅이 된 그의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나왔다.

나는 차마 그의 일그러진 몰골을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저승사자인 양 검푸른 빛까지 괴괴히 도는 공배씨의 상판은 더 이상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4층 기원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다가 들른 화장실 거울 속에서 나는 공배씨 못지않게 비참하게 일그러진 화상을 만날 수 있었다. 퀭한 눈자위와 말라 터진 입술, 초점과 생기를 모두 잃은 눈동자, 나이 서른에 저승길 받아놓은 듯 보이는 초췌한 눈 밑 그늘.

나는 두 번 다시 호○기원을 찾지 않았다.

그 뒤, 바둑이 두고 싶을 때마다 동네 가까운 의왕기원에 들락거렸다. 가끔 방내기는 했지만 호○기원에서처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통신바둑을 발견, 좌표를 일일이 입력해야 하는 불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통신 바둑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기원 출입이 뜸해졌고, 지금은 정 바둑이 두고 싶으면 가끔 인터넷 대국만을 즐긴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추억을 좇는 소회도 변한다.

지금은 환갑이 훨씬 넘으셨을 공배씨! 뵙고 싶은 생각은 지금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 때 그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기보다 웃음이 먼저 터진다. 지금도 여전히 "나, 먹고 죽을래두 돈 없어!" 하며 동네 바둑판을 엎고 다니시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추억 나의 바둑 기사>는 모두 5편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글은 지난 97년 주간 <바둑361>에 기고했던 글을 다듬은 것입니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픈 추억일지라도 그 한 자락은 향기롭기 마련입니다. <오마이뉴스> 섹션의 '사는 이야기'라는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인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도 젊습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들을 추슬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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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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