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3년도 제 28기 왕위전 도전 7번기. 당시, 스물여덟의 청년 유창혁 육단과 열아홉의 소년 이창호 칠단은 3:3 타이 스코어인 가운데 그 마지막 대국을 남겨두고 있었다.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한국기원은 김수영 사범의 공개 해설을 마련했다(김수영 사범은 지난 2005년 5월 20일 오후 2시, 도원동 자택에서 췌장암 투병 중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도전기가 벌어진 다음 해인 1994년에 한국기원은 관철동 살림을 접고 홍익동 시대를 열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관철동 한국기원에서의 왕위전 공개해설은 그 마지막 대국처럼 역시 마지막이었다. 나는 만사 제쳐두고 종로구 관철동으로 나갔다. 공개 해설장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왕년, TBC에서 명 해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수영 사범의 해박하고 구수한 입담은 여전했고, 열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전언에 의하면 유창혁 육단은 그날, 지독한 감기와 복통 때문에 연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모양이었다. 승천을 앞둔 용이 그만 진흙 밭에 떨어졌으니 뉘라서 감히 그 비늘을 닦아줄 것이냐며 김수영 사범은 한탄조로 사설을 읊었다. 해설장의 팬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한 수 한 수 전해질 때마다 한숨과 영탄을 반복했다.

점심시간. 나는 지인들과 식사하기 위해 관철동 골목을 걷다가 정말 우연히 저만치 앞서 혼자 걷고 있는 이창호 칠단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랫단이 유난히 짧은 상의와 허리 아래 걸린 바지 때문에 그의 허리와 엉덩잇살은 민망하게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열아홉 나이라면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때. 그의 뒷모습은 결코,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열아홉 또래의 소년이 아니었다. 엉덩잇살이 드러난 지도 모른 채 깊은 상념에 빠져 걷는 소년. 잠시 멈춰 잠깐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고개를 외로 꼬고 무심하게 걷는 소년. 심하게 말하면, 가출한 아이 같은 입성으로 마치 인류가 멸망한 뒤의 관철동 골목을 혼자 걷는 듯한 그 어떤 주변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 없이 유영하듯 걷는 소년!

누가 저 소년을 일러 천재라 했던가? 천재라 하면 적어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요기(妖氣), 빈센트 반 고흐의 청기(靑氣), 이중섭의 서기(瑞氣), 조훈현의 귀기(鬼氣), 유창혁의 미기(美技)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순간 나는, 어쩌면 저 소년이 지금 천상(天上)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착각이었을까?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미끄러지듯,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나는 시선을 사로잡힌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였다. 일종의 충격이었다.

“사인 받으러 갑시다!”

일행 중 누군가 소리쳤고, 나는 극구 말렸다.

“방해하지 맙시다, 우리. 명색이 한국 바둑의 희망인데, 상념을 깨지 맙시다!”

오후 대국. 접전이 계속되었고 한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내용으로 진행되다보니 해설장의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는 왠지 서늘하게 느껴졌던 이창호 칠단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저녁 늦게 대국이 끝났다. 대국자들도, 해설을 맡으신 김수영 사범도, 해설장의 뭇 관중도, 모두 저녁 식사를 거른 채 지켜본 결과는 유창혁 육단의 승리!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와 일행, 그리고 몇 명의 팬들이 미처 해설장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순간, 김수영 사범이 뜻밖의 선물을 안겨 주셨다. 늦게까지 남아준 팬들에 대한 답례 차원으로 한참 검토 중인 대국장을 잠시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대국장. 바둑판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임선근 사범의 주도로 10여 명의 프로 사범들이 둘러서 있었고 검토가 한창이었다. 유창혁 육단은 연신 잔기침을 해대면서도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목청이 커졌고 얼굴은 불콰했다. 이창호 칠단은 임선근 사범의 잦은 질문에 간신히 모기만한 목소리로 응대했고 표정은 마치 남의 바둑판 앞에 앉은 사람 같았다.

바둑판을 쳐다보는 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먼 세상을 응시하는지 모를 미묘한 시선으로 가끔 남 얘기 하듯 읊조리는 그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결코 범상치 않은 인상이 강렬하게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혔고, 지금도 이창호 사범의 그때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바둑에 한을 품은 어느 절세의 고수가 수백 년 간 구천을 떠돌다가 환생한 이!"

한동안 바둑인들에게 회자되던 이창호 사범의 별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창호 사범의 전생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고, <일본 바둑의 역사>라는 책을 보다가 무릎을 치게 되었다. ‘이약사’라는 인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는지 베일에 가린 채, 조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국내에서는 바둑 적수가 없어 일본에 건너갔다는 일화가 전해질 뿐인 사람이다. 그나마 앞서 밝힌 책과 다른 야사에 몇 줄 소개된 것이 전부다.

기록에 따르면 ‘이약사’는 조선의 당대 최고 고수였으며 '바쿠후(幕府)' 시대, 일본의 4대 ‘혼인보오(本因防)’이자 ‘메이진고도코로(名人棋所)’였던 신화적 인물 ‘도오샤쿠’(道策)에게 넉 점에 무너진 뒤, 초단 면장을 받고 떠났다고 한다. 또 어떤 기록에는 면장을 거절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사라졌다고도 한다.

그 기록을 접하며 나는, 명치끝에 피멍이 들었고 심장 밑동부터 저며 오는 심한 통증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개연성이 충분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순장바둑밖에 몰랐던 이약사가 이미 현대식 포석을 구축하고 있던 '일본식'으로 도오샤쿠와 일전을 벌였다면 몰판을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넉 점의 치석이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더 이상 바둑 적수가 없어 일본까지 건너갔다면 필시, ‘만 천하를 바둑으로 평정하리라’는 이상과 기개가 충만했을 터!

충격적인 패배에 따른 상처는 결코 치유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면장을 거절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사라졌다는 기록이 어쩌면 가장 개연성이 높을지 모른다.

그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현해탄에 몸을 던지지 않았을까? 이창호가 진정 ‘바둑에 한 맺힌 절세의 고수가 수백 년간 구천을 떠돌다가 환생’한 사람이라면 그의 전생은 이약사로 귀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마치 현실처럼, 한 맺힌 일전이 상상 속에서 펼쳐졌다.

이약사가 도오샤쿠와 일전을 벌였던 그날은 찌는 듯한 날씨였다. 대나무 숲을 가르며 지순한 절개로 위장한 칼끝 바람이 이약사의 허파를 옥죄며 낡은 소매 자락을 희롱했다. 바둑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 있었다.

바둑돌 통속에서 이약사의 약지 끝이 가늘게 흔들리며 점멸하고 있었다. 땟국에 절은 저고리 속에 잔뜩 웅크린 그의 모습은 너무나 초췌했다. 반면, 눈부실 정도로 단아한 묵색 장삼을 걸친 도오샤쿠는 좌상(坐床)에 깊숙이 몸을 의지한 채 오만한 손놀림으로 쥘부채를 연신 흔들어댔다. 이약사의 눈두덩, 그 처량한 골짜기에 살기와도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약사가 패배를 인정한 순간, 도오샤쿠의 만면에 고고한 빛이 설핏설핏 바스라졌다. 이약사가 혼인보오 가의 문을 나설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개똥지빠귀가 피를 토하듯 울어댔다.

현해탄. 몸을 던지기 직전, 갓을 벗어 도포와 함께 개키는 이약사의 마른 손등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그의 눈가에 검붉은 이슬이 맺혀 떨어졌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죽어서도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환생하지 못한다면 혼이라도 돌아와 오늘의 치욕을 꼭 갚고 말리라!”

이창호의 좀체 열릴 줄 모르는 입술은 그날의 한을 앙다문 까닭일까? 이창호의 돌부처인 듯 변함없이 늘 서늘한 표정은 혹 전생의 피맺힌 절규를 다 토하지 못하는 슬픔 때문일까?

서봉수 구단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창호에게 물어봐, 나는 몰라!"

이제 이창호 구단도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서른 고개의 가파른 중턱을 넘고 있다. 한 맺힌(?) 현해탄은 물론, 중원까지 수없이 왕복하며 갚을 만큼 갚고 이룰 만큼 이룬 그는, 점점 세상사에 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더 늦기 전에, 어서 빨리 좋은 짝을 만나 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그 바둑 또한 더욱 무르익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추억 나의 바둑 기사>는 모두 5편으로 이어집니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픈 추억일지라도 그 한 자락은 향기롭기 마련입니다. <오마이뉴스> 섹션의 '사는 이야기'라는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인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도 젊습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들을 추슬러볼까 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