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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치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 증상이 심각한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걷다가 길을 잃으면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있지만 운전을 하다 도로에서 길을 잃으면 몹시 당황하게 된다. 뒷 차가 클랙슨을 빵빵 울려대는데 가야할 방향은 모르겠고, 자칫하면 사고라도 날 수 있는 상황에서 친절하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어디 운전할 때 만이랴. 살다가도 종종 길을 잃는다. 마치 안개 자욱한 거리에 갇혔을 때처럼 시야가 조망되지 않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삶은 참 막막하게 다가온다. 그럴 때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같은 것이 있다면, 그 화살표만 믿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영은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서영은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시냇가에심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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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룩한 문학적인 업적이 적지 않음에도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라는 틀에 갇혀 살아야 했던 서영은. 20대 초반에 30살이 많은 김동리를 만나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던 소설가 서영은은 오랫동안 산티아고 순례를 꿈꿨다. 그러다 66세가 되던 해, 간추리고 간추린 12.3kg의 배낭 하나를 지고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야곱이 전도 여행을 했던 길, 야곱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까지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서영은은 그 중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방인 이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을 택해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길 곳곳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최소한의 숙박 시설만을 갖춘 일종의 민박집인 알베르게가 있다. 3유로만 내면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며 1200km에 이르는 길을 40여 일에 걸쳐 걷는 여정, 12.3kg의 배낭을 메고 하루 일곱, 여덟 시간을 걷다보면 배낭의 무게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무겁게 양쪽 어깨를 짓누른다. 

서영은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을 버릴까를 고민하는 여행이라고 한다. 티셔츠, 비타민 같은 꼭 필요해서 챙긴 것들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하나씩 버리다가 나중에는 여분의 칫솔, 심지어 읽기 위해 가져갔던 책의 표지 한 장도 찢어서 버릴 정도로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순전히 두 다리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때로는 인적 하나 없는 산길을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때로는 바다를 끼고 걷기도 한다. 하늘과 바람과 풀숲을 따라 걷는 길, 그 길에서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것은 노란 화살표다.

노란 화살표는 자원봉사자들이 순례자들을 위해 곳곳에 붙여놓은 안내표지다. 순례자들은 오직 화살표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이 산티아고임을 믿고 화살표만을 보고 걷는다. 때로는 석축에 때로는 나무기둥에 때로는 길바닥 돌에 감춰 있는 듯 그려져 있는 노란화살표.

무려 1200km의 아득한 길을 걷는 동안 순례자들은 노란 화살표가 보이는 한 불안해 하지 않고 씩씩하게 걷는다. 그러나 중간에 혹시 오랫동안 노란 화살표가 나타나지 않으면 순례자들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불안해 하고 노란 화살표를 찾기 위해 애쓴다. 그러다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면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반가워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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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도 걸어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이런 노란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해도 이 길이 반드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훨씬 마음을 다잡고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서영은의 노란 화살표는 비단 목적지 산티아고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영은은 이 길을 걷는 내내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기도하며 걷는다. 결국 코브레세스에서 나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성령 체험을 하게 되고 영안을 뜨게 된다. 이후 평소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을 하나하나 새롭게 깨달아간 서영은은 목적지 산티아고에 이르러 이렇게 고백한다.

"산티아고는 내게 순례의 종착지가 아니다. 산티아고는 내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문이자 또 다른 화살표이다. 그 화살표가 성경속의 모든 선지자에게 그랬듯 이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자리로 나를 이끈다 해도..."

오직 노란 화살표에 의지해 40여 일 동안 걷는 1200km의 길, 때로는 쨍쨍한 햇볕을 견디고 때로는 비옷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소리 삼으며 아스팔트 길을, 가시덤불 우거진 산길을, 말똥과 소똥이 풀어헤쳐져 걸쭉해진 진창길을 헤쳐가기도 한다. 중간에 가게가 없어 배고픔을 참은 채 잠들기도 하고, 배낭에 남아있는 마늘과 멸치를 끓여 국물을 마시며 허기를 때우기도 한다. 그 길이 어찌 쉬웠으랴.  하물며 우리 인생길은 더 말해 뭐 하랴.

오래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순례자중에 한 명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니 어떠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40일 동안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인생보다는 쉬워요. 인생은 끊임없이, 끝을 모르고 걸어야 하잖아."

그 인터뷰는 오랜 세월동안 잊히지 않았다. 40여 일 동안 계속되는 걷기, 그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인생보다는 어렵지 않음을, 40여 일을 걸은 그 오기로 우리네 인생길을 한걸음씩 또 걸어가야 함을 깨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로 떠나는지도 모른다.

나도 오랫동안 산티아고를 가슴에 품어왔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읽고 부터였으니 꽤 오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산티아고가 하나의 멋진 풍경사진처럼 다소 현실감없이 느껴졌다면 서영은의 이 책은 산티아고를 마치 화인처럼 선명하게 내 가슴에 노란 화살표를 각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조만간 멀지않은 시간에, 나도 내 인생의 40일을 뚝 떼내어 산티아고로 떠날 각오를 가슴에 새기게 하는 책이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시냇가에심은나무(2013)


태그:#산티아고, #인생길, #서영은, #노란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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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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