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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쳐다본 합천임란창의기념 현창시설 전경. 종합안내판과 기념탑, 그 뒤로 외삼문은 보이지만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당과 그 아래의 기념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쳐다본 합천임란창의기념 현창시설 전경. 종합안내판과 기념탑, 그 뒤로 외삼문은 보이지만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당과 그 아래의 기념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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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호수를 굽이굽이 휘어감으며 쉼없이 되풀이되는 청정 자연 속 굽잇길, 결코 끊이지 않을 것 같은 꼬부랑 산허리 길은 저 혼자 내처 이어진다. 하지만 사람의 길은 언젠가 그칠 수밖에 없다. 나그네의 발길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539-2에서 멈춰 선다.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관'이라는 이름의 '현창(顯彰, 밝게 드러냄) 시설'이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홍살문이 찾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한다.

홍살문 앞에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목숨 바친 선열(先烈)들의 영위(靈位) 봉안(奉安)과 유물(遺物), 유품(遺品)들을 전시한 성지(聖地)입니다, 합천군 창의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합천군 창의사'는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관'의 약칭인 셈인데, 안내판은 '과연 이런 곳답게 한자 용어가 즐비하다' 싶은 느낌을 준다. 머잖아 이곳을 찾아오거나, 직접 오지는 못하더라도 이 글을 읽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할 학생들을 위해 한자어의 뜻을 하나하나 새겨본다.

창의사는 의병들을 제사 지내는 집

선열(先烈)은 먼저 돌아가신 의로운 분들을 뜻하고, 영위(靈位)는 그분들의 영혼을 모시기 위해 작은 나뭇조각에 성함을 새긴 위패를 가리킨다. (위패는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 흔히 사용하는 지방에 해당한다.) 봉안(奉安)은 위패를 편안하게 모시는 일이고, 유물(遺物)과 유품(遺品)은 선열들께서 남기신 물품들이다.

물(物)과 품(品)은 옥편을 찾아보면 둘 다 '물건'으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유물과 유품은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목욕 용품'으로 쉽게 예를 들어보자. 목욕 용품은 목욕을 하는 데 필요한 작은 물건들이다. 따라서 선열들께서 남기신 벼루, 붓, 장신구 등 늘 지니고 계셨던 '작은 물건'들이 바로 유품이다. 유물은 품고 다니셨다고 보기에는 큰 것들과 사후에 생겨난 물품들. 예를 들면 후손들이 발간한 문집 등이다.

창의(倡義)는 의병을 일으키는 일이고, 사(祠)는 제사를 지내는 집을 가리킨다. 즉 합천군 창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우신 합천의 선열들을 제사 지내고, 그분들께서 남기신 물건들을 소중하게 보관, 전시해둔 곳이다. 그래서 안내판은 이곳을 성지(聖地)라고 표현하고 있다.

합천창의사와 마주보고 서 있는 악견산, 이곳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적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218호인 악견산성이 있다.
 합천창의사와 마주보고 서 있는 악견산, 이곳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적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218호인 악견산성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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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로 들어서면 눈앞을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는 악견산(嶽堅山)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먼저 사람을 압도한다. 악견산은 창의사 터를 임진왜란 의사 추모 성지로 인정하게 만드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점에서 합천군 창의사는 평평한 땅에 자리잡고 있는 대구 임진의병관이나 경남 의령 의병기념관보다 일단 한 수 위에 올라 있다.

게다가 악견산 정상부에 있는 악견산성(경상남도 기념물 218호)은 그냥 산성이 아니라 임진왜란 유적이다. 둘레 약 660m, 높이 평균 2.7m의 악견산성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산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7년전쟁 중인 1594년(선조 27) 당시 성주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했다.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는 이 산성이 1439년(세종 21)에 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의사 바로 앞 악견산성도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으로 오르는 길 중 합천군 창의사(아래, 창의사)에서 가장 가까운 등산로의 출발점은 성리(城里)이다. 산성 아래에 있다고 해서 성리라는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창의사 정면에서 똑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창의사를 찾아왔고, 악견산성도 임진왜란 유적이고, 등산로 입구도 가까이 있으니 응당 악견산성에 올라보아야겠다. 하지만 우선은 창의사 경내부터 둘러볼 일이다.

합천 창의사 종합 안내도
 합천 창의사 종합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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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도 앞에 서서 창의사 전역 답사의 순서를 헤아려본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계단이 아찔하지만, 단숨에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아도 되도록 전역이 4단으로 구분되어 있어 다행이다. 첫 계단을 오르면 기념탑이 나온다. 경내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기념탑은 종합안내판에서 쳐다볼 때 시야에 잡힌다. 하지만 창의사에서 가장 중요한 답사처인 사당과 유물관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안내판의 해설부터 꼼꼼하게 읽은 다음에 답사를

가장 먼저 (1)종합안내판의 해설을 읽고, 이어 (2)기념탑을 보기로 한다. 기념탑을 보지 않고서는 더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 이는 당연한 순서 매김이다. 그 다음, 둘째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외삼문(숭인문) 아래를 지나야겠다.

그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 잠깐 생각해 본다. 곧바로 (3)사당에 들러 참배를 하는 것이 옳겠다. 홍살문 앞 안내판에서 본 '선열 영위 봉안'과 '유물, 유품 전시' 두 항목을 떠올린 까닭이다. '선열 영위 봉안'이 '유물, 유품 전시'보다 앞에 있었다. (4)유물관 내부를 둘러보는 순서와, (5)사적비를 살펴보는 일은 맨 마지막 차례로 남겨둔다.

이윽고 종합안내판의 해설을 읽는다. 물론 모든 문화재는 답사했을 때 현장의 안내판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전문서적이나 전문가의 기행문을 읽고 오면 더할 수 없이 바람직하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눈앞의 안내판을 읽는 수고 정도는 아끼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합천임란창의사적비
 합천임란창의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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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과 정유재란(선조 30년, 1597)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적과 맞서 싸워 국난(나라의 어려움, 즉 임진왜란)을 극복한 합천 선민들의 충혼의백을 모신 성(聖,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높고 깨끗한 대상)스러운 곳이다.'

첫 문단은 우리가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침략 전쟁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일본군이 처음 쳐들어 온 때는 1592년이고, 남해안 일대에 병력을 남겨둔 채 철수했다가 다시 쳐들어온 것이 1597년이다. 그래서 '7년전쟁'이라는 다른 이름도 얻었고, 합해서 흔히 임진왜란으로 불려진다.

이곳 창의사는 나라 전체의 의병들을 모신 곳은 아니고, 왜적에 맞서 싸워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낸 합천 지역 의병들을 제사 지내는 현창 시설이다. 따라서 합천 일대의 임진왜란 역사를 중점적으로 해설하고, 관련 자료들도 합천 지역의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의병은 '착한 사람'들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충혼의백(忠魂義魄)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을 가리킨다. 혼과 백은 약간 다르다. 혼은 위패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인 반면, 백은 시신과 더불어 땅속에서 흙으로 변하는 영혼이다. 물론 이는 인간의 죽은 뒤 세상에 대한 조선 시대 사람들의 내세관이 반영된 표현이다. 사람이 죽고 나면 혼백이 그렇게 나뉘어서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민'은 정확하게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추측하자면 '착한 사람(善民)' 정도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착하다(善)'와 '옳다(義)'를 대략 같은 뜻으로 간주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의병은 곧 선민이다.
  
의병기념탑 둘레에 설치되어 있는 의병 조각 중 일부
 의병기념탑 둘레에 설치되어 있는 의병 조각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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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년간의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이 대륙 정복의 허황된 꿈을 갖고 16만의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국토를 유린하자(짓밟자) 패퇴만을 거듭한 관군을 대신하여 우리 선조들은 붓과 호미를 던지고 분연히(힘차게) 일어났다.'

일본은 1590년 이전 120여 년 동안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다. 그런데 본문은 '싸움' 대신 '전쟁'이라는 용어를 썼다. 전쟁은 본래 국가 사이의 싸움을 가리킨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열도 안의 작은 국가들끼리 120여 년에 걸쳐 벌여온 전쟁을 끝내기 이전까지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전쟁 발발 직전 일본은) 풍신수길이 등장하여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풍신수길로 대표되는 '일본'의 '꿈'은 '허황'했다. '대륙 정복'을 목표로 했지만, 그것은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투 경험 없고 낙후한 무기만 가진 조선군, 패퇴 당연

조선의 군대는 어째서 '패퇴만을 거듭한 관군'이 되고 말았을까.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는 '임진왜란의 초전(初戰, 초기 전투)에 있어서 조선의 군대는 200년간의 평화 속에서 실전(實戰, 실제 전투)의 경험이 없는데 비하여 왜군은 오랜 전국시대를 겪는 동안 전쟁의 경험을 쌓은 바 되어 조직화된 정예군이었을 뿐 아니라 숫적으로도 압도적이었으므로 조선군은 이들을 대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또 왜군의 새로운 무기인 조총은 조선군에게 심리적으로 공포를 주고,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기념탑의 합천 의병 조각 작품
 기념탑의 합천 의병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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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호미, 호남

붓 : 붓이 선비의 상징이 된 것은 투필종융(投筆從戎)이라는 중국 한나라 반초(班超)의 옛일에서 비롯되었다. (投:던질 투, 筆:붓 필, 從:좇을 종, 戎:무기 융) 관청에서 글을 베껴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반초가 하루는 붓을 던지면서 "대장부로 태어나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쳐야지 어찌 붓과 벼루 사이에서만 지내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그 후 반초는 흉노의 지배를 받던 서역(중국 서부)으로 가서 그 일대를 크게 정복하는 업적을 달성한다. 그 이후 문인(선비)이 글을 포기하고 군인이 되는 것을 투필종융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호미 : 고려가요에 <사모곡>이 있다. 이 노래는 '호미도 날이지만 낫같이 들 리도 없습니다' 하고 시작한다. 아버지(호미)도 부모(날)이지만 어머니(낫)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사모곡은 노랫말에 호미, 낫과 같은 농기구가 등장하는 것을 통해 작가의 신분을 농민으로 추정한다.

호남(湖南) : 호수의 남쪽 지대라는 뜻으로 대략 지금의 전라남도 일원을 가리킨다. 이때 호수는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축조된 전라북도 김제의 벽골제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붓과 호미를 던지고 분연히 일어났다'라는 표현은 지배 계층인 선비들은 물론 일반 백성인 농민들까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뜻이다. 붓은 선비의 상징이고, 호미는 농부의 상징이다. 즉, 붓을 던지고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은 선비였고, 호미를 던지고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은 농민들이었다. 

'정인홍 의병장을 중심으로 윤탁, 박사제, 전치원, 이대기를 비롯한 의병 4천~5천여 명이 봉기하여 초계, 현풍 등 낙동강 연안 일대와 고령, 성주, 진주, 금산 등지로 진출하여 내륙 깊숙히 북상한 (1)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호남(湖南) 의병군과 협동하여 혈전 끝에 적을 여지없이 무찔러 (백 자나 되는 대나무 끝에 선 듯 위험한)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던 나라를 구하는 데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2) 전국 의병 궐기의 효시가 되었다.

세계 전사상(전쟁 역사에서) 유례(비슷한 경우) 없는 의병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전의(싸울 뜻)를 상실한 일본군이 전선(적군끼리 마주치는 싸움터)을 축소, 남해안으로 물러났고, 이에 힘입어 (3) 관군의 재정비와 명군의 지원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침략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게 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펼친 의병 활동의 빛나는 공적이다.'

안내판은 합천의병의 큰 업적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창의사가 발행한 <합천 임란사 2집>은 조선에 있던 석정삼성(石田三成)이 풍신수길에게 '(앞장서서 평양, 한성 등에 올라간) 전선(前線)의 일본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수송로를 경비하는 군사도 없으며, (후방 지역은 일본군이 없는) 무인(無人) 상태'라면서 '점령지는 (의병들 때문에) 안정되어 있지 않다, 진격을 끝내고 점령지를 굳히는 것이 좋겠다'라고 보고했다는 사실을 싣고 있다. 

일본군의 보급로 차단하고 전라도 침입 막아낸 합천 의병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인용되어 있는 최영희의 논문 <임진왜란의 재조명>도 '왜군은 (1593년 1월) 평양 패전 이후 서울에 집결하였지만 개전 당시 병력의 30~40%를 전투, 기아, 질병으로 소모하여 실전의 수행 능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하여 의병들과 조선 수군에 의한 보급로 차단이 적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울산충의사 간행 <울산 임란사 재조명>에 수록되어 있는 한명기의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 또한 '의병들의 활약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 정담, 이복남, 권율의 웅치 및 이치 전투, 고경명 등의 금산 전투와 더불어) 초전의 연전연패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망하지 않고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중략) 특히 남명 문하의 유생들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군의 낙동강 도강을 차단하거나 지연시킴으로써 전라도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라고 설명한다. 

왼쪽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비탈의 정인홍 묘소, 대구 달성군 구지면 현풍곽씨 문중묘지의 곽재우 묘소, 경북 고령군 쌍림면 김면유적지의 김면 묘소
 왼쪽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비탈의 정인홍 묘소, 대구 달성군 구지면 현풍곽씨 문중묘지의 곽재우 묘소, 경북 고령군 쌍림면 김면유적지의 김면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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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합천의병은 일찍 창의하고, 또 승전을 거듭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도록 이끌어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안내판의 '효시'는 합천의병이 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백성의 군대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합천 임란사 2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로 창기(倡起, 의병을 일으킴)함으로써 타 지방 창의를 촉발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관군이 재기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다'라는 설명을 덧붙여 혹시 모를 오해의 싹을 예방하고 있다.

물론 안내판의 문장만 꼼꼼하게 읽어도 그런 오해가 발생할 일은 없다. 안내판은 합천의병을 '전국 의병 궐기의 효시'로 정의했다. '전국 의병의 효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의병 (들이) 궐기(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친 창의)의 효시'는 '전국 의병의 효시'와 다르다. 이는 <합천 임란사 2집>이 '(합천 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기함으로써'라 하지 않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로 창기함으로써'로 표현한 것과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 합천 의병의 승전이 원동력

정리하면, 창의사 안내판은 합천 사람들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데 합천의병이 최초로, 최고로 이바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이 망하지 않고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의병이고, 그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만든 원동력이 합천의병이니, 합천의병의 공로는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빛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합천창의사 종합안내판
 합천창의사 종합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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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합천 군지>도 오해를 막기 위해 경남 김해 의병군의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김해의 선비 송빈(宋賓)은 4월 14일 부산, 그리고 4월 15일 동래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고향의 벗들인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유식(柳湜)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 17일 김해성으로 몰려온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첫 전투에서 아군은 승리한다.

18일,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거 몰려왔다. 관군  장수들은 진작 도망가버린 상태에서 송빈 등 의병들은 19일, 그리고 20일까지 적들과 맞서 치열하게 싸운다. 하지만 군사의 수와 장비 면에서 워낙 열세였던 탓에 송빈 등 의병군들은 20일 장렬하게 전사한다. 관군들도 속수무책으로 허무하게 무너진 전란 초기에, 의병만으로 나흘간이나 맞상대로 일본군을 대적한 쾌거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중략)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영남(嶺南)의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最先起兵).' 이 기록에 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시쳇더미 속에 묻혀 있던 양업손(梁業孫)이 살아나와 이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전쟁 초기의 극심한 혼란 상황 탓에 김해성 의병들의 분전은 임금과 대신들에게조차 알려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도 아니었던 까닭에 다른 지역의 창의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런 뜻에서, 각각 수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들을 계속 격파한 정인홍, 김면, 곽재우의 승전은 전국 곳곳에서 의병군이 줄지어 조직되는 데에 정신적으로, 또한 최초로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물(溪)가에서 번창하는(茂) 마을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경북 고령 낙동강변의 무계(茂溪)리. 지금도 마을 바로 앞에 연못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마을앞 들판이 강변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592년 6월 5일 정인홍 의병군이 이곳에서 일본군을 선제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의병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에 알려주었다.'(<합천 임란사>의 표현)
 물(溪)가에서 번창하는(茂) 마을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경북 고령 낙동강변의 무계(茂溪)리. 지금도 마을 바로 앞에 연못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마을앞 들판이 강변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592년 6월 5일 정인홍 의병군이 이곳에서 일본군을 선제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의병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에 알려주었다.'(<합천 임란사>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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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의병은 셋째, 관군이 재정비되고 명나라가 참전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전쟁의 흐름이 역전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물론 이는 정인홍을 비롯한 합천 의병만이 아니라 그들과 마찬가지로 조식의 제자였던 김면, 곽재우 등 경상우도(낙동강 서쪽 경상도) 의병들 모두의 공로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합천 의병은 정유재란 때에도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왜적과 싸우는 초지일관의 정신을 지켜갔다는 점이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 창의가 전무(아주 없음)한 가운데 유일하게 합천 지역에서 창기하여(의병을 일으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왜적을 소탕하고, 지원 온 명군의 작전을 향도(안내)하여 우리의 강토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해인사 입구인 합천군 가야면 소재지의 '정인홍 기념관'도 정인홍의 경력을 소개하는 게시물에 '1597년(선조 30) 7월 왜군의 재침(정유재란)이 있자 유일하게 의병을 일으킴'이라고 적고 있다.
 해인사 입구인 합천군 가야면 소재지의 '정인홍 기념관'도 정인홍의 경력을 소개하는 게시물에 '1597년(선조 30) 7월 왜군의 재침(정유재란)이 있자 유일하게 의병을 일으킴'이라고 적고 있다.
ⓒ 정인홍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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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의병, 정유재란 때는 유일하게 창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일본군이 항상 대군으로 작전을 하였기 때문에 소수의 의병으로서는 성과를 올리기가 극히 어려워 의병의 활동이 미미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임진란 최후의 저명한 의병장' 김덕령을 선조가 '이몽학 반란 사건에 관계가 있다는 무고'에 따라 처형한 이후에는 '의병장이 존재했어도 이미 의병장으로서 가치를 상실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 창의가 거의 없었는데, 그래도 정인홍은 다시 의병군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광의 사당인 창의사. 경내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광의 사당인 창의사. 경내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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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민족 정기(올바른 기운)를 발휘하여 나라와 겨레를 수호한 의병장 및 의사 백십 위와 이름 없이 산화한(목숨을 바친) 수많은 무명(이름 없는) 의사의 충혼을 모셔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종합안내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다. 종합안내문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은 결과 합천의병의 개요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듯하다. 물론 더 자세한 내용은 유물관을 둘러보면 새롭게 익히게 될 것이다.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창의사)에 들러 참배부터 한 다음, 내려와 유물관에서 '공부'를 해야겠다.

책에 실려 있는 '창의사 상량문'을 소개해 보면

<합천 임란사 2집>에 실려 있는 '창의사 상량문'의 번역문 중 일부를 읽어본다. 상량(上樑)은 목조 건축물을 짤 때 지붕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종도리(宗道里, 마룻도리, 마룻대)를 올려 놓는 일이다. 상량은 서까래를 걸기 직전에 하는 마지막 작업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집의 골격이 완성되는 단계인 까닭에 가장 어려운 일을 마쳤다는 뜻에서 흔히 상량식(제사 형태의 행사)을 연다. 그 의식에서 읽혀지고, 다시 오동나무 함에 넣어 밀봉된 다음 종도리 밑에 홈을 파 보관한 글이 상량문이다. 이곳 상량문은 이상학(李相學)이 단기 4331년(서기 1998년)에 지었다.

창의사 상량문의 어려운 용어 풀이


2문단 / 들보 : 방의 칸과 칸 사이를 가로질러 두 기둥 또는 두 벽체 위에 놓이는 구조목. 지붕의 마룻대와 십자 형태로 놓이고 도리와 직각으로 만난다.
들보떡 : 집을 돌보아 줄 신령에게 바치는 떡
고첩(古堞) : 오래된 성의 성가퀴, 성가퀴는 성벽 위 요철 모양의 방어 시설
청야(淸野) :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리 군량미와 무기 등을 없애고, 논밭의 곡식까지 베어버려 들판을 깨끗하게 함. 청야 작전은 고구려 이래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져 온 전국 단위의 수비 전술임.
3문단 / 영맥(靈脈) : 영험한 산맥
동래(東來) : 동쪽으로 옴
장구(長久)히 : 영원히
4문단 / 천극(天極) : 지구(地球)의 남극과 북극을 잇는 선을 끝없이 연장했을 때 닿는 천구(天球)의 남극과 북극
불해(不解)하니 : 해산하지 않으니
5문단 / 척강(陟降) :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함.
춘추(春秋) : 봄과 가을
상로(霜露) : 서리와 이슬
6문단 / 근원(根源) : 뿌리
도(道) : 사람이 나아가야 하는 바른 길
7문단 / 축원(祝願)하옵건대 : 비옵건대
천신(天神) : 하늘의 신
지신(地神) : 땅의 신
상서(祥瑞) : 좋은 일이 일어난 조짐
천고(千古) : 아득한 역사
삼강오륜(三綱五倫) : 유교(儒敎)의 도덕 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과 다섯 가지의 인륜(人倫).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고,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억년(億年) : 영원
행덕(行德) : 행동과 덕망
정심(貞心) : 곧은 마음
일월(日月) : 해와 달
창건(創建) : 처음으로 지음.

'(전략) 선비와 농부가 향병(鄕兵, 의병)을 함께 거행하고(일으키고), (창의사를 새로 짓자는) 의논이 사백 년만에 확정되어 관(관청)과 민(군민)이 사우(祠宇, 사당)를 같이 지었도다. (중략) 

어기여차! 들보떡을 동쪽으로 던지니 악견산상(岳堅山上)에 아침해가 붉었도다. 산머리에 고첩(古堞)이 아직도 있으니 당년(當年, 그 해)의 청야(淸野)의 공로를 생각하네. (중략)

어기여차! 들보떡을 서쪽으로 던지니 일만 길 황매산 구름과 함께 가지런하네. 영맥(靈脈)이 동래(東來)하여 금악산을 이루니 대지와 같이 장구(長久)히 창의사를 보호하리로다.

어기여차! 들보떡을 북쪽으로 던지니 오도산 높고 높아 천극(天極)을 떠받치네. 여러 해로 수비 군사 불해(不解)하니 어느 해에 나라 통일 이룩할꼬.

어기여차! 들보떡을 지붕 위로 던지니 살아계신 혼령님 길이 척강(陟降)하시도다. 춘추(春秋)로 상로(霜露) 내릴 적에 살찐 돝(돼지) 맑은 술 굽어 드소서.

어기여차! 들보떡을 아래로 던지니 낙동강의 물 하늘에 닿아 도도히 쉬지 않고 흐르니, 근원(根源) 있는 우리 도(道) 이와 같도다.

엎드려 축원(祝願)하옵건대 상량(上樑)한 뒤로 천신(天神)은 도움을 내리시고, 지신(地神)은 상서를 드러내서 나라 위해 군사를 일으킨 충성과 절의를 천고(千古)에 드러내고, 위태함을 보고 목숨을 바쳐 삼강과 오륜을 억년(億年)에 심어 큰 이름 우주 가운데 드리웠으니, 후손들은 반드시 선조의 행덕(行德)을 본받고 정심(貞心)이 일월(日月) 위에 뛰어나니, 후인(후손)들은 반드시 선열의 공을 본받을 것이로다. 창건(創建)이 극히 어려웠으니 썩히지 말지어다.'

참배를 한다. '반드시 선열들의 공을 본받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렇게 참배를 온 일이 '창건이 극히 어려웠으니 썩히지 말지어다'라고 당부한 상량문의 가르침에 조금이나마 복무한 행동이라고 자부해 본다. 하지만 절을 하고 있는 내 뒤통수를 선열들께서 지켜보시는 것만 같아 잠깐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가 문득 쑥스럽기도 하다.

합천창의사 내부
 합천창의사 내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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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인홍, #합천 창의사, #조식, #임진왜란, #상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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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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