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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투표를 한 사람들이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잡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권력으로 뭘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백지투표를 한 것은 환멸에 빠졌기 때문인데, 달리 그들이 얼마나 환멸을 느끼는지 분명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 중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 4년 뒤 상황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얼핏 보면 정부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비극적인 소설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을 더 깊이 탐구해보면 길 잃은 정부가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리송한 희극으로도 비춰진다.

도시는 4년 전 한 여자를 제외한 국민 전체가 백색실명 전염병으로 눈이 먼 사태를 겪었다. 이때 정부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상실되었다. 상실 기간이 며칠 지속되자 눈먼 자들 사이에서는 시각의 부재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부패가 행해진다.

그 악행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눈을 지닌 안과의사의 부인은 어둠속에서 판치는 두목을 살해한다. 두목의 반인류적인 행위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눈뜬 자였기에, 그 모든 행위를 볼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자였기에, 여자는 눈먼 정부가 하지 못한 정의를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낳는다.

백지투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시각의 유무와 관련 없이 실명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이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발생한 집단 백지투표 역시 현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번 사건의 배후자는 아니며 우연히 국민들의 생각이 일치하여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그들을 조정했다는 느낌을 들게 할 정도다.

책 표지
▲ 눈뜬 자들의 도시 책 표지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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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투표날이었다. 이 나라 수도의 모든 투표소에 오후가 되도록 투표자들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오후가 되어 비가 제법 약해지자 몇 명의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왔지만 겨우 투표함 밑바닥을 덮을 정도였다.

며칠 후 정부는 재투표를 실시한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왔다. 그러나 투표용지의 83%는 좌익정당도 중도정당도 우익정당도 선택하지 않은 백지였다. 선택한 17%의 투표결과로 보면 여당이 이겼지만, 정부는 국민들의 이러한 선택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한 이들을 반역자로 보고 심문을 하기 시작한다. 여러 고문 기구를 통해 무효투표를 한 사람들을 골라내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투표결과에 대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유를 행한 행위라며 오히려 국가를 나무란다.

화가 난 총리는 수도에 계엄령을 내린다. 그날 저녁 국가 공무원들은 자신들끼리 약속을 한 뒤 나라를 빠져나가고, 도시는 국민들만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마을을 청소하고 죄지은 자를 처벌하며 평화를 유지한다.

이에 총리는 더욱 분개하여 국민들 몰래,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국가의 한 건물을 폭파시킨다. 도시에 남아있던 시장은 국민들의 고통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사표를 제출하고 국민의 일원으로 돌아간다.

도시를 빠져나간 정부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여러 말이 오가며 몇몇 사람들이 직위를 그만두고 스스로 물러난다. 총리는 어떤 공무원이 직위를 버렸는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민들을 보고 의아해할 뿐이다.

마침내 총리는 새로운 계획을 생각한다. 스파이를 도시에 풀어 백지투표의 배후를 찾자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4년 전 백색실명이라는 희귀한 전염병이 돌았었다. 그때 안과의사의 부인만이 그 실명을 피했다. 총리는 바로 이 여자가 이 백지투표의 배후일 가능성이 크다며, 여자를 둘러싼 모든 지인들을 찾아가 심문을 한다.

여자를 심문하기 위해 경정, 경감, 경사 그리고 살인청부업자를 국가에 투입한다. 처음에 경장은 총리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며 여자를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이후 계속되는 관찰 중에 경장은 여자는 아무 죄가 없고 그저 국민의 일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총리는 경장으로부터 여자의 사진을 받아 백지투표 배후라는 제목을 달아 신문에 실은 뒤 4년 전 백지실명의 원인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경장은 정부의 음모를 신문사에 알린다. 총리는 또다시 분노를 느끼고, 남몰래 경장을 살해한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부인과 그녀의 개 콘스탄테도 함께 살해한다.

'백(白)'이 상장하는 것들

주제 사라마구는 '백(白)'으로 두 소설을 하나로 묶었다. 희다는 느낌을 주는 백(白)은 항복을 나타내는 신호이기도 하며, 소리 없는 비폭력 저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민들은 투표를 하였지만 투표결과를 통해 자신들의 환멸을 정부에 보여주었다.

오히려 정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백지투표는 이 외 여러 의미를 나타낸다. 당원들의 거짓 선거공약에 눈감은 국민들의 행위일 수 있고, 정부를 눈 뜬 장님으로 치부하는 국민들의 전략적인 반기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는다. 특정 인물, 특정 국가, 특정 시기를 지목하지 않았다. 인류가 존재하고 국가가 있다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발생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국민들의 신성한 권리로서 국민들 스스로가 자유롭게 다양한 의사를 표출 하고 제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기존의 투표권리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를 보고는 오히려 분노를 한다.

소설 속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우선적으로 국가를 빠져나가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었다. 상상 속에서 자신들을 향한 국민들의 저항을 만든 후 수도를 자국 정부의 계엄 명령으로 포위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수준에서 가혹한 심문, 거짓말 탐지기, 위협, 고문을 동반한다. 또한 국민들에게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입하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낸 후 마치 국민의 폭동인 양 죄 없는 사람 몇 명 잡아들여 고문을 한다. 정부는 사람들을 고문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높여 국민들을 겁줄 수 있고, 자신들에게 향한 국민들의 분노를 고문당하는 이에게 집중시키는 두 가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지금 눈을 뜨고 있는가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총리는 '냄비를 만든 사람이 냄비 뚜껑도 만들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냄비를 만든 사람은 백지실명 전염병이 창궐할 때 유일하게 비껴나간 안과의사의 부인을 말한다.

총리는 4년 전 이 여자가 행한 의로운 살인을 끄집어내어 심문하고, 이를 빌미로 사람들의 백지투표를 주도했다는 죄목을 붙인다. 그리고 도시에 첩자를 투입해 여자를 감시 한다.

하지만 첩자로 나선 경장은 죄 없는 여자를 보고 죄책감을 느껴 자신의 직위를 한탄한다. 경장은 자신도 결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국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영토가 있어야 한다.

정부 공무원들은 추상적인 주권도, 비생물적인 영토도 아닌 유기적인 국민에 해당한다. 이들이 국민들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은 국가의 구성원이 되려는 행위를 포기한 것과 같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를 국민의 일원임을 포기하고 신격화 한다면, 국민들은 누구라도 그들이 눈먼 장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한 눈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 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가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눈먼 남자들이 등장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이들 눈먼 자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진실과 거짓을 비판하지 않고, 국가의 보살핌에 의존하는 안이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동안 개 짖는 소리를 증오해왔다.

그러나 스스로 개 소리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개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한 동물인데, 진실을 지키려다 죽게 된다.

이렇게 정부의 악행을 보여줄 유일한 증거가 사라지고 도시는 다시 눈먼 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만약 장님들이 개 소리와 총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쯤 의심을 해보았다면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그들도 눈먼 '장님'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의미로 눈먼 남자들은 정부 공무원들이기도 하다. 정부도 보안부서도 경찰도 없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도시에서 정부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거짓된 오보에 현혹되지 않고 한 번쯤 다시 생각하며 진실을 보는 '눈뜬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을 멀게 하려는 눈먼 정부에 백지투표를 행사함으로써 잠식되어가는 국가의 존속을 살리고 눈먼 정부를 눈뜨게 하려고 시도하던 것이다.

언제쯤 정부가 국민들의 노력을 알고 눈을 뜰지는 알 수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당신은 지금 눈을 뜨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사소히 여긴 한 표들이 모여 국가에게 공포를 줄 수 있듯, 올바르게 눈 뜬 정부를 만들려면 국민 한 명 한 명이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눈뜬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해냄 / 2007년 3월)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2007)


태그:#주제 사라마구, #눈뜬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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