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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뜬 자들의 도시> 겉표지
ⓒ 해냄
폭우가 쏟아지는 날, 선거가 진행된다. 우익 정당, 좌익 정당, 중도정당 모두 자신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그 궁금증을 비웃기라도 하듯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유권자의 80퍼센트 이상이 백지투표를 낸 것이다. 정치권은 당황한다. 정부는 이 초유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선거를 한 번 더 하는 무리수를 두지만 결과는 똑같다. 정부 꼴만 우습게 된다.

정부는 분노한다.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각 장관들은 이 선거의 결과를 조종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테러리스트일까? 아니면 무정부주의자인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백색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사실 정부는 분노한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괴상한 논리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며 수도를 옮기기로 한다. 자신들을 향해 백색투표를 던진 시민들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다. 대신, 군대를 동원해 계엄령 상태로 수도를 포위한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정부는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의 배경은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 4년여가 흐른 뒤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눈먼 자들의 도시>의 그 기이한 사건, 오직 백색만 보일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백색실명'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 모두 그 사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정부가 그렇다. 정치인들은 모두 침묵한다. 그들은 그 기억을 깡그리 잊고 싶어 한다. 그런데, '백색'이 또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시민들에 의해서.

정부는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실명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듯, 범인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부는 어떻게든 이 사건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뭔가를 원한다. 그때, 정부는 이상한 정보를 얻게 된다. 4년 전 모두가 실명했을 때 오직 한 여자만이 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지도자들은 그 소식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희생양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아예 보지 못하는 걸까?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노골적으로 정부를, 민주사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작태며, 이상한 논리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가관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게 만든다.

뿐인가. 자신들이 버리고 간 수도에 폭탄테러를 한 뒤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태를 정점으로 <눈먼 자들의 도시>의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모습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도대체 정부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이 모습은 <눈먼 자들의 도시>와 오버랩된다. 그때, 정부는 무책임했다.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이 눈이 멀어 두려움에 떨 때, 그들을 마구잡이로 병원에, 실상은 수용소라고 부를 만한 곳에 집어넣었었다. <눈뜬 자들의 도시> 못지않은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백색과 관련된 대중의 모습은 여러 모로 대비가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대중은 인간성을 상실했다. 남자들은 먹을 것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여자들을 강간했다.

여자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따랐다. 그들의 사회는, 도무지 사회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먼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대중은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고 또한 정복하려 했다. '보는 것'을 잃은 그들은 인간다움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백색투표를 한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질서정연하다. 누가 보면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다. 정부에서 교묘하게 범인을 알아내려 해도 그들은 태연자약하게 대응한다. 정부가 떠나고, 파업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직접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집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정부 때문에 돌아온 사람들을 반겨주는 것도 그들이다. 그들은 실명됐을 때의 그들과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비되는 것은, 희망을 손에 쥔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그녀'는 혼자 볼 수 있다는 사실에도 혼자만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유리해도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눈뜬 자들의 도시>의 '그'도 그렇다. 정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 그 세력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홀로 볼 수 있던 '그'는 혼자만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 않았다. 수도에 남아, 그 옛날 '그녀'가 그랬듯 성스러운 행동을 하려 한다.

그 행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르다. 주제 사라마구가 냉혹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의 최후는 비참하다. 나아가 4년 전 희망이었던 그녀 또한 이 작품에서 비참한 수난을 당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정치를 비판하는 우화일까? 아니면 눈을 뜨고도, 실명했을 때보다 더 못 보는 모든 것들을 향해 경고일까?

그 답이 무엇이건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처절한 분노와 잔인한 두려움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으로 무장한 이 책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듯 또 하나의 서늘한 칼날이 되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소설이라는 도구의 힘을 극대화시킨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 '걸작'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다.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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