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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교황의 십자가'.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테러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사를 집전했던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교황의 십자가'.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테러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사를 집전했던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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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서쪽으로 직경만 6km인 공원을 걷는다. 그나마 가볍게 등을 떠미는 바람 덕분에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바람에 맞서지 않고 간혹 이렇게 바람을 타고 걷다 보면 산다는 것이 바람에 실려 부유하는 먼지 같다. 해서 늘 가볍기를 소망한다. 무거운 욕심에 짓눌리지 않고, 유쾌하게 떠돌 수 있게.

런던 하이드 파크와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합친 크기라는 더블린 '피닉스 파크'의 면적은 약 700ha. 도시 한가운데 있는 공원으론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데 공원을 둘러싼 담장 길이가 16km에 달한다. 그 길고 긴 담장 안엔 울창한 숲과 너른 초원이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아일랜드 대통령궁과 국방부 청사, 미국 대사관저 등도 있다.  

목숨 걸고 아일랜드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대통령궁과 미국 대사관저 등이 있어서 경호가 삼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에도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제집 정원에서처럼 조깅을 하거나 수다를 떨며 유람을 한다. 그리고 수많은 차량들이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더블린 시내를 오가는데 출퇴근 시간엔 상습정체구역이 되곤 한다.

유달리 '안보'나 '보안'에 민감한 한국 사람들이 보기엔 경기(驚氣)가 날 일이다. 그러나 안내를 해준 이는 더없이 태평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안 보여도 다 보고 있으니까요. 그게 경호 아닌가요?"

1662년에 처음 문을 열었으니 피닉스 파크의 역사는 350년이 넘었다. 공원 이름이 피닉스 파크여서 사람들은 '불사조(phoenix)'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불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게일어 'fionn uisce'와 영어 피닉스(phoenix)가 발음이 비슷해 영국 식민 통치자들이 그렇게 이름 지어 버렸다. 피닉스 파크에 불사조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예속은 그렇게 언어의 강탈에서부터 온다.

게일어 'fionn uisce'는 '금발의 물'이란 뜻. 아일랜드 사람들은 '깨끗한 물(clear water)'을 '금발의 물'이라 했으니 피닉스 파크는 불사조와는 아무 상관없는 '깨끗한 물의 공원'인 것이다.

공원이름이 피닉스 파크여서 사람들은 ‘불사조(phoenix)’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불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피닉스 파크에 있는 불사조 조형물 머리 꼭대기에 더블린 갈매기가 앉아 있다.
 공원이름이 피닉스 파크여서 사람들은 ‘불사조(phoenix)’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불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피닉스 파크에 있는 불사조 조형물 머리 꼭대기에 더블린 갈매기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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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깨끗한 물의 공원' 가운데쯤 확 트인 초원을 배경으로 높이 35m의 흰색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979년 아일랜드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집전했던 바로 그 자리다. 십자가는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그래서 '교황의 십자가(Papal Cross)'라고 부른다.

교황의 아일랜드 방문을 앞두고 영국의 은근한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교황에 대한 각종 테러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2009년에 비밀 해제된 아일랜드 경찰 당국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교황에 대한 각종 테러 위협은 매우 높아서 "경찰의 어떤 보안 대책도 교황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적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주저하지 않고 갔다. 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쓴 아일랜드 방문이었다. 가톨릭이 국교인 아일랜드의 당시 인구는 약 380만 명.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 아일랜드 국민 130만 명이 운집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존경과 추앙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탄탄한 경호를 받은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자유를 좇아서 진실 쪽으로 가야 한다. 진지하게 진실을 추구하고, 그렇게 찾은 진실을 본인의 확신과 행동으로 붙잡을 자유!"
- 시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어록 중에서

'교황의 십자가'를 등에 업은 채 북쪽으로 약 1km를 걸으면 아일랜드 대통령궁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이 흰색 건물은 한 나라 수반의 거처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작고 아담한 대통령궁을 빛나게 하는 주인공이 있다. '리멤버 라이트(remember light)'라 불리는 작은 가스등이다. 이 가스등은 24시간 내내 켜져 있다. 이 등을 맨 처음 켠 이는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 메리 로빈슨(Mary Therese Winifred Robinson)이었다.

'유럽의 수치'에서 '아일랜드의 기적'으로

1990년, 메리 로빈슨이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혼과 낙태가 법으로 금지됐을 정도로 보수적인 나라 아일랜드에서 여성이 남성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했다는 것 자체가 혁명 같은 일이었다. 메리 로빈슨이 "나의 당선은 여성 유권자들이 집안에서 요람 대신 구제도를 흔들어 갈아치운 결과"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유럽의 열등아'라로 불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부채는 국고의 130%를 넘었고, 실업률은 17%에 달했으며 인플레이션은 20%로 치솟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대통령궁 한켠에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는 등이 있다. ‘리멤버 라이트(remember light)’라 불리는 작은 가스등이다.
 아일랜드 대통령궁 한켠에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는 등이 있다. ‘리멤버 라이트(remember light)’라 불리는 작은 가스등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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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나라살림보다 아일랜드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안팎의 비하였다. 대처 보수정권이 이끌었던 영국을 빗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데 유럽에서 제일 가난하다며?"하는 조소가 쏟아졌다. 또 "술이나 좋아하고 놀기나 좋아해서 제 나라엔 일자리가 없어 늦어도 서른 살이 되면 모든 젊은이는 조국을 버리고 떠나는, 아일랜드는 유럽의 수치"라는 극언까지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일랜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했다. 메리 로빈슨은 대통령 취임 선서에서 아일랜드가 낳은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를 인용해 "나는 아일랜드인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통령궁 한켠에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는 가스등을 켜둔다.

"7000만 해외 동포여, 조국 아일랜드는 지금 이 순간도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혼 합법화와 피임 합법화를 요구하며 투쟁해온 이 젊은 여성 대통령의 절절한 호소에 나라 안팎에 흩어져 있던 아이리시들이 응답하기 시작한다. 안에서는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결의가 모아졌다. 나라 밖에서는 아이리시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졌다.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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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빈슨이 재임한 7년 동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국민 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고, 평균 경제성장률은 9.9%를, 소비지수는 유럽연합 대비 90%를 기록했다. 유럽 언론들은 이를 '아일랜드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유럽에서 가장 골칫거리였던 아일랜드가 이제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찬가를 쏟아냈다.

그는 아일랜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아일랜드 경제를 살리는 길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아이리시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한편 그는 아일랜드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아일랜드의 국격을 높이는 일에 앞장선다.

800년 동안 적대했던 영국 여왕과 최초로 만났으며 여전히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던 북아일랜드를 네 차례나 방문했다. 그리고 내전 피해가 극심했던 르완다와 소말리아 난민구호 활동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한다. 그는 이 공로로 '유엔 국제인권상'을 수상했다.

그에 대한 아이리시들의 신뢰와 지지는 임기 말에도 식을 줄 몰랐다. 그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즈음엔 아예 대통령 선거를 없애고 메리 로빈슨에게 종신 대통령 직을 주자는 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종신 대통령'을 거부하고 '인권운동가'의 길을 다시 걷는다.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된 것이다.

지난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박근혜 후보와 메리 로빈슨을 견주어 이야기했다. 또 많은 이들이 메리 로빈슨의 높은 지지율 비결을 '신뢰와 원칙의 리더십'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메리 로빈슨의 신뢰와 원칙은 어디서 온 것이며 그 핵은 무엇일까.

그는 아일랜드의 명문인 트리니티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법을 공부한 뒤 모교인 트리니티대학교에서 최연소 법과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나이 스물 다섯에 의회로 진출해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출세 이력이 신뢰와 원칙의 기반이었을까.

메리 로빈슨은 한 인터뷰에서 "진정한 리더십은 나만이 아니라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자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우리 여성들이 해방되고자 1970년 처음으로 피임 합법화를 주장했다. 십여 년이 흐른 1979년에야 피임이 합법화되었다. 결혼의 자유를 주장하며 1976년 이혼 합법화를 처음 주장했다. 또 십여 년이 흐른 1986년에야 이혼 합법화의 길이 열리더라. 나는 출세가도를 달려온 것이 아니라 끈질긴 도전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인권운동을 계속하며 늘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것이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칭하는 메리 로빈슨이 대통령을 퇴임하던 1997년. 그에 대한 지지율은 93%였다.

700헥타르가 넘는 피닉스 파크는 도시 한가운데 있는 공원 중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79년 이곳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집전하자 당시 아일랜드 인구 380만 먕 가운데 약 130만 명이 참가했다.
 700헥타르가 넘는 피닉스 파크는 도시 한가운데 있는 공원 중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79년 이곳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집전하자 당시 아일랜드 인구 380만 먕 가운데 약 130만 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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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일랜드, #여성 대통령, #교황, #가톨릭,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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