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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 미국이 대사관저 임대료로 아일랜드 정부에 내는 돈은 1년에 단 1센트, 한국 돈으로 15원이다.
 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 미국이 대사관저 임대료로 아일랜드 정부에 내는 돈은 1년에 단 1센트, 한국 돈으로 15원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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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관계에 대한 반응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리고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길거리에서 첫사랑과 우연찮게 마주쳤다. 머릿속에서는 매우 담담한 말투로 "잘 지냈어?" 하고 인사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미 몸은 눈동자부터 얼어붙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돌부처가 되고 만다.

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 앞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사관저 앞을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며 거리낌 없이 놀았다. 하지만 나는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내 몸에 탑재된 '미국'은 아직은 그만큼 친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다수 청년들이 그렇듯 나 역시 나라 간의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한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것은 다 미제'라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기에는 망해가는 집안 꼴이 싫어 '아메리칸 드림'을 몰래 꿈꿔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을 청와대만큼이나 철통 경비하는 한국 경찰을 보면서 거리감이 생겼다. 한반도 곳곳에서 각종 훈련을 빙자한 군사행동을 하는 미군을 보며 공포의 소름이 돋았다. 한국은 이를 돕기 위해 해마다 거액을 대고 있다.

한국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해마다 미국에게 건네는 돈은 연간 8000억 원 이상. 주한 미군의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를 분담한다는 명목이다. 국방부가 국회에 낸 자료에 따르면 이 돈 가운데 2012년에만 미집행액이 3074억 원(이월액 2596억 원, 불용액 479억 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국은 쓰고 남은 돈을 한국에게 돌려주기는커녕 주한미군 분담금을 더 내라고 압박하고 있다.

똑같이 주둔 미군의 분담금을 내고 있는 일본은 총액 기준이 아닌 지출항목 기준으로 금액을 정하고 있다. 특히 '미-일 방위비 분담금 협정' 4조에 "미군이 이들 비용의 경비를 절약하는 데 한층 노력한다"고 명시해서 분담금을 줄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은 총액 기준으로 내고 있을 뿐 아니라 협정에 비용 절감과 관련한 아무 조항을 두고 있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돈을 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저런 상념에 젖은 내게 미국 대사관저 앞을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마냥 신기했다. 만약 한국 사람들이 서울 덕수궁 옆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 주변을 배회하면 어떻게 될까? 경찰에게 바로 제지당하고 말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그림 같은 초원에 세 들어 사는 미국 대사관저의 연간 임대료를 듣고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국이 아일랜드 정부에 내고 있는 대사관저 임대료는 1년에 단 1센트. 한국 돈으로 치면 1년에 약 15원을 내고 있다는 것인데 싸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그냥 상징적인 금액이다. 두 나라는 도대체 어떤 특별한 관계이기에 겨우 1센트로 임대계약을 맺고 있는 것일까.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아일랜드 술집

존 F. 케네디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민간 신앙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이리시 펍이나 가정집엔 거의 대부분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존 F. 케네디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민간 신앙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이리시 펍이나 가정집엔 거의 대부분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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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일랜드 남쪽에 있는 모네골(Moneygall)을 전격 방문한다. 정치·외교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해외 파병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도 아니었다. 모네골은 모계가 아이리시 혈통인 오바마 대통령의 외가 선조들의 고향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44대 대통령인 오바마를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아이리시 혈통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아이리시 혈통임을 부각시킨다.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미국 최초의 아일랜드계 대통령이었다. 모계가 아일랜드계였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입만 열면 "나는 아이리시"라고 자랑했다. 역시 모계가 아일랜드계였던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여러 차례 아일랜드를 방문해 애정을 과시했다.

아일랜드계 미국 대통령 가운데 아이리시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는 단연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다. 케네디는 부계와 모계 모두 아일랜드 혈통이다. 특히 그는 와스프(WASP,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판치는 미국에서 아일랜드 혈통, 가톨릭 신자로 대통령에 당선한 유일한 인물이다.

케네디 집안은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웩스포드(Wexford)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이리시들의 케네디에 대한 존경심은 민간신앙에 가까울 정도인데 아이리시 펍(pub)이나 아이리시 일반 가정 가운데 케네디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이 많다.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1963년 아일랜드를 방문한다. 아일랜드를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처럼 미국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아일랜드계 미국인(Irish American)'이라 부르는데 미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그 수가 무려 4000만 명에 가깝다.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2%에 달하는 수다. 약 70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아이리시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약 4000만 명이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혈통과 지역공동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리시들의 특성으로 보아 이들이 미국에서 어떤 유대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한반도를 떠나 사는 동포들에게, 한국은 '어머니의 땅'일까

감자 대기근이나 영국의 가혹한 수탈로 아이리시들은 아일랜드를 떠나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외국에서 살고있는 약 7000만 명의 아이리시 가운데 약 4000만 명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더블린항구에서 바라본 리피강과 더블린 시내 전경.
 감자 대기근이나 영국의 가혹한 수탈로 아이리시들은 아일랜드를 떠나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외국에서 살고있는 약 7000만 명의 아이리시 가운데 약 4000만 명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더블린항구에서 바라본 리피강과 더블린 시내 전경.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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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수탈을 피해 아메리카로 건너간 아이리시들은 미국의 독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서 서명한 13개 주를 대표하는 지도자 56명 가운데 8명이 아일랜드계였던 것이다. 

미국 역시 영국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각별하게 아일랜드를 챙겨왔다. 1922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이를 가장 먼저 인정한 나라도 미국이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평화정착을 위한 휴전협상을 중재한 이는 아일랜드 혈통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가 경제도약을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미국은 자국에 본사를 둔 인텔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제록스사와 IBM 등 IT 관련 회사들의 유럽법인을 아일랜드에 두도록 노력했다. 그러니 아일랜드로서는 1센트가 아니라 공짜로 대사관저를 내줘도 아깝지 않을 사이인 것이다. 

한반도를 떠나 살고 있는 해외 동포 수가 720만 명을 넘어섰다. 어떤 이는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어떤 이는 중국인이 되었으며 또 어떤 이는 여전히 '불법 체류자'로 살고 있다. 그가 한국어를 잘하건 못하건, 피의 절반이 한국이건 아니건 간에 대한민국은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어머니의 땅'일까.

2011년 5월 악천후를 뚫고 선조들의 고향인 모네골을 다녀온 오바마 대통령은 더블린 시내 한복판에서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연설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아이리시들은 '세계 대통령'이 되어 외가를 방문한 검의 피부의 '외손자 오바마'를 뜨겁게 환영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아이리시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빌 클린턴 대통령. 그는 재임 때는 북아일랜드 평화를 중재하고 미국에 본사를 둔 IT업체들이 유럽 법인을 아일랜드에 둘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각별하게 아일랜드를 챙겼다. 한 아이리시 펍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다녀간 뒤 우편물을 보냈다며 이를 벽에 걸고 자랑하고 있다.
 아이리시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빌 클린턴 대통령. 그는 재임 때는 북아일랜드 평화를 중재하고 미국에 본사를 둔 IT업체들이 유럽 법인을 아일랜드에 둘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각별하게 아일랜드를 챙겼다. 한 아이리시 펍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다녀간 뒤 우편물을 보냈다며 이를 벽에 걸고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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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케네디, #클린턴, #오바마, #미국 대사관, #해외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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