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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스기자연관의 입구는 삼나무 군락이 마치 거대한 조형물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야쿠스기자연관의 입구는 삼나무 군락이 마치 거대한 조형물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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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관한 '야쿠스기 자연관'은 야쿠스기(屋久杉)의 생물학적 특징은 물론이거니와 이 나무에 의지해 살아 온 야쿠시마 사람들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간단한 상식부터 확인하기로 하자.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나무가 삼나무와 편백나무다. 일본어로 삼나무는 스기(杉), 편백나무는 히노키(檜)라 한다. 생김새가 비슷해 나무에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서는 그 나무가 그 나무 같다.

내구성과 내수성이 강해 예로부터 고급 건축재와 가구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일본의 전통 신사와 사찰의 신축과 보수에는 대부분 스기와 히노키를 쓴다. 특히 편백나무로 만든 '히노키탕'은 온천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으뜸으로 친다. 나무 욕조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은근한 피톤치드 향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삼나무는 가고시마현 야쿠시마에서부터 아오모리현 쓰가루반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본 전역에 걸쳐 분포한다. '아키타스기' '다테야마스기'처럼 독특한 특징과 대규모 군락을 이루는 경우에는 지역 명칭이 붙기도 한다. 야쿠시마의 경우 인공림이 아닌 천연림 가운데 가장 큰 삼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야쿠스기'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야쿠시마에 있다고 해서 모두 야쿠스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않는다. 오로지 1000년 이상 된 삼나무만 야쿠스기라 부르고, 1000년이 되지 못한 삼나무는 '고스기(小衫)'라 한다. 마치 80대가 즐비한 경로당에서 60대는 어른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삼나무의 평균 수명이 500년임을 감안하면, 야쿠스기의 가치와 중요성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과 기발한 아이디어는 특히 박물관과 테마파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교육과 학술적 성격을 가진 박물관이 전시 기능에 치중하는 반면, 오락적 성격이 강한 테마파크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테마파크를 만드는 일본은 박물관에 테마파크와 같은 오락적 성격과 다양한 체험을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다.

삼나무로 만든 블록을 끼워 맞춘 야쿠스기자연관의 바닥은 관람객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야쿠시마 삼나무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됐다
 삼나무로 만든 블록을 끼워 맞춘 야쿠스기자연관의 바닥은 관람객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야쿠시마 삼나무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됐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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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감을 활용해 야쿠스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야쿠스기 자연관 역시 마찬가지다. 이 박물관의 진정한 가치는 입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관람객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입장한다. 적잖은 규모의 박물관에서 굳이 이런 거추장스러운 방식을 택한 것은 바닥 때문이다.

박물관 내부의 모든 바닥은 삼나무를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마치 퍼즐을 맞추듯 끼워 놨다. 일체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끼워' 놓은 것이다. 관람객이 삼나무의 감촉을 직접 느낄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의도에 충분히 부응하자면, 신발만 벗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아예 양말까지 벗어 버리는 것이 좋다. 이 비싼 바닥재를 언제 또 밟아 보겠는가.

전시물 가운데 관람객을 처음 맞는 것은 '생명의 가지'라는 이름이 붙은 길이 5m, 무게 1.2톤에 이르는 거대한 나뭇가지다. 7200년을 살았다는 '조몬스기'의 일부분이다. 2006년 내린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을 헬기를 이용해 옮겨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조사해보니 나뭇가지의 수명만 무려 1000년이 넘었다. 1000년의 세월을 버텨 온 가지가 고작 눈 때문에 부러졌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나뭇가지라고 얕보지 마시길... 천 년을 살았어요

'생명의가지'로 이름붙여진 이 거대한 조몬스기의 나뭇가지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생명의가지'로 이름붙여진 이 거대한 조몬스기의 나뭇가지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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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몬스기의 수령이 7000년이 넘는다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나무가 처음 발견된 1966년과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추정 수령이 최소 4000년이라는 점이 근거가 됐다. 석기(조몬)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조몬스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과학적인 측정값은 2170년 이상이라고 한다. 더 정확한 수치는 나무의 중심부까지 시료를 채취해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나무의 보호를 위해서 시도하지 않고 있다.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조몬스기의 정확한 나이는 조몬스기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미궁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몬스기가 현재까지 발견된 야쿠스기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삼나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1660년을 살다 베어진 야쿠스기의 나이테에는 나무가 살았던 시절의 역사가 촘촘하게 표시되어 있다
 1660년을 살다 베어진 야쿠스기의 나이테에는 나무가 살았던 시절의 역사가 촘촘하게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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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가지'를 시작으로 야쿠스기 자연관은 야쿠스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맡아보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흥미진진하게 구성돼 있다. 특히 조몬스기의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형 파노라마 사진, 1660년의 나이테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실물 야쿠스기, 삼나무를 벌목할 때 사용한 톱과 각종 연장, 1930년대 야쿠시마의 숲에서 삼나무를 벌목하며 살던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물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그중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전시관 한 쪽에 쌓여있는 '히라기'와 짚으로 엮은 쌀가마였다. 히라기는 가로 50cm, 세로 10cm 크기의 나무판자를 말한다. 이는 너와집의 지붕으로 쓰인 너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섬 면적의 90%가 숲으로, 농사지을 땅이 절대 부족했던 야쿠시마는 에도시대(1603~1867)에 쌀 대신 히라기를 세금으로 바쳤다. 또한 이를 팔아 쌀과 생활용품을 구했다. 히라기 2310장을 쌀 한 섬으로 환산했다. 당시 쌀 1섬은 60kg 정도였다.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적게는 수백 배에서 많게는 수천 배까지 차이나는 비대칭적 교환이었다. 바로 여기에 야쿠시마의 숲과 사람들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다.

지붕을 얹는 데 사용된 히라기는 2310장이 쌀 1섬과 맞먹는 가치였고, 그만큼을 만들기 위해서는 뒤에 보이는 크기 만큼의 야쿠스기가 필요했다
 지붕을 얹는 데 사용된 히라기는 2310장이 쌀 1섬과 맞먹는 가치였고, 그만큼을 만들기 위해서는 뒤에 보이는 크기 만큼의 야쿠스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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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일본을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영주(다이묘)들의 자치권은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재를 유지하기 위해 몇몇 정책을 시행했다. 그중에 '참근교대'(산킨코다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전국에 걸쳐 260명 내외의 영주가 있었는데, 이들은 1만 석 이상의 토지와 군사력 그리고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영주들이 행여 반란이라도 도모할까봐 가족의 일부를 에도(도쿄)에 인질로 잡아두고, 영주들 역시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무르도록 했다.

요즘 같은 시절에야 수행원 몇 명 데리고 신칸센이나 비행기 타고 오가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다. 영주가 에도까지 행차하자면 따라 움직이는 관료와 수행 인력만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렀다. 고향과 에도에 두 집 살림하랴, 정기적으로 에도에 행차하랴, 자연스레 각 지역 영주들의 살림살이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재정 지출이 많아지니 군비 확충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덕분에 도쿠가와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265년간 유지할 수 있었고, 에도는 이미 그때부터 인구 100만이 넘는 메트로폴리스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막부의 사정과 달리 몇몇 영주들은 재정이 어려워져 파산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특히 에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영주일수록 이동비용이 많이 들어 재정 압박이 심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충성심이 강한 영주는 도쿄와 오사카 가까운 곳에 비교적 비옥한 토지를 나눠주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영주는 변방으로 보냈다. 규슈는 당연히 변방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남쪽인 가고시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다.

1년 고생해서 번 돈을 길바닥에 뿌리다니

에도(도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츠마번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마미군도와 류큐국을 차례로 정벌하고 야쿠시마의 삼나무 벌목을 강화했다
 에도(도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츠마번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마미군도와 류큐국을 차례로 정벌하고 야쿠시마의 삼나무 벌목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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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고시마는 '사츠마번'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츠마번의 영주가 에도로 한 번 행차하는데 소요된 비용은 지금의 물가로 약 50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260개 영주들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열심히 농사지어서 번 돈을 1년 내내 길바닥에 뿌리다가 망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거듭된 전쟁과 참근교대로 심각한 재정난에 처한 사츠마번은 결국 '침략과 착취'라는 수단을 동원한다. 우선 가고시마에서 각각 400km와 600km 떨어진 아마미군도와 류큐국(지금의 오키나와)을 차례로 정벌했다. 류큐국을 거점으로 조선·중국·네덜란드 등과 밀무역을 하고 다음으로 아마미군도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를 독점했다.

당시 사탕수수 즙을 응고시켜 만든 흑당은 가장 비싼 식재료였다. 사츠마번은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아마미군도의 모든 땅에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했다. 심지어 멀쩡한 논밭까지 갈아엎었다. 노동착취에 식량을 재배할 땅까지 잃었으니 아마미군도 사람들의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당시를 '흑당지옥'이라 표현할 정도로 치를 떤다.

오로지 톱과 도끼만으로 거대한 야쿠스기를 쓰러트리는 것은 목숨을 건 노동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숲밖에 없어던 야쿠시마 주민들은 이 일에 메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톱과 도끼만으로 거대한 야쿠스기를 쓰러트리는 것은 목숨을 건 노동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숲밖에 없어던 야쿠시마 주민들은 이 일에 메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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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의 상황 또한 이와 비슷했다. 야쿠시마에는 삼나무의 벌목을 독려했다. 에도시대 주요 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에는 대량의 히라기가 필요했고, 야쿠스기로 만든 히라기는 최고의 건축자재였다. 사츠마번은 쌀 대신 거둔 히라기를 도쿄와 쿄토로 가져가 비싼 값에 팔았다.

안전 장비는커녕 톱과 도끼가 도구의 전부였던 시절, 해발 600~1000m에 이르는 숲으로 들어가 둘레는 10m가 넘고, 높이는 수십 m에 이르는 거목을 벌목하는 일은 목숨을 건 노동이었다. 하지만 히라기의 수요가 늘수록, 사츠마번의 재정난이 가중될수록 착취는 심해졌다.

그때마다 야쿠시마 주민들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때마다 수천 년을 살아 온 야쿠스기는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2310장이 쌓인 히라기 더미와 1섬의 쌀가마는 그 혹독했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야쿠스기 자연관을 둘러보고 나니 야쿠시마의 숲과 조몬스기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이제 열 시간 남짓 지나면 지난 8년 동안의 기다림이 현실이 된다는 생각에 살포시 긴장되기도 했다. 더불어 새벽부터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쌓인 피로가 그제야 몰려왔다.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어 서둘러 숙소로 이동했다.

1만4000명에 이르는 주민의 90%가 관광업에 종사하는 야쿠시마에는 섬의 규모에 비해 충분하고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특히 등산객들을 위한 저렴한 민박과 여관이 많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의 보상으로 그리고 조금 특별한 이유로 첫날밤은 약간의 사치를 부리기로 했다.

30만 평 대지에 있는 호텔, 대단하구나

바다에서 바라 본 야쿠시마 이부스키호텔의 전경. 건물 뒷편을 호위하듯 버티고 서있는 산이 모쵸무다케다
 바다에서 바라 본 야쿠시마 이부스키호텔의 전경. 건물 뒷편을 호위하듯 버티고 서있는 산이 모쵸무다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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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의 12방위 가운데 5시 방향에 위치한 이와사키호텔은 30만 평의 대지에 고작 125개의 객실 밖에 없는 리조트호텔이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모쵸무다케가 마치 호텔을 호위하듯 버티고 선 모습이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대지는 모두 산책을 위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정원 내로 제법 큰 자연 폭포가 흐르고, 대규모 귤 농장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다.

로비로 들어서면 우선 거대한 야쿠스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야쿠스기를 실물 그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호텔 내부 4층 높이까지 뻗어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모쵸무다케가 병풍처럼 버티고 섰다. 다큐멘터리 <시간의 숲>에서 박용우와 타카기 리나가 처음 만났던 장소다. 나는 한류 드라마에 빠진 일본 아주머니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녹색의 파노라마는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선명했다.

여기서는 그저 하염없이 숲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는 그저 하염없이 숲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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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온천으로 달려갔다.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니 긴장은 풀어지고 피곤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5분을 담그고 있으니 바람이 불어온다. 멀리 동중국해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숲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이 수시로 교차한다. 바람이 맛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의 향기도 숲의 향기도 그렇게 각별할 수가 없다. 아주 오래 그 바람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마시고 또 마셔도 질리지 않는 바람이었다.

조몬스기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만만찮은 여정이다. 등산로를 출발해 가는 데만 5시간, 왕복으로 9~10시간이 소요된다. 숲의 낮이 언제 막을 내리고, 숲은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등산객은 가능한한 출발을 서둘러야 한다. 오전 5시에는 숙소를 출발해야 안전한 하산을 기약할 수 있다.

내일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왠지 오늘밤은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태그:#야쿠시마, #취생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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