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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에 있는 7200년된 삼나무. 석기시대부터 존재했던 삼나무라는 뜻으로 '조몬스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야쿠시마에 있는 7200년된 삼나무. 석기시대부터 존재했던 삼나무라는 뜻으로 '조몬스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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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屋久島). 이 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8년 전이었다. 일본 가고시마현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건넨 명함에는 기이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인쇄돼 있었다. 야쿠시마에 있는 7200년 된 삼나무라 했다. 7200년…. 그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때부터 야쿠시마는 '언젠가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 목록의 앞순위에 올랐다.

몇 년이 흘러 후배가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꽤 인기 있는 미스터리 작가 온다 리쿠가 쓴 <흑과 다의 환상>이라는 소설이었다. 미스터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시큰둥했는데, 배경이 야쿠시마라는 말에 냉큼 책을 펼쳤다.

과거와 현재,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꼼짝없이 매료됐다. 특히 작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묘사된 야쿠시마는 당장에라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밥벌이의 엄혹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행은 이상하다. 각 장소마다 갈 타이밍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흑과 다의 환상>의 한 구절이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한 것도, 그 마음을 진정시킨 것도 온다 리쿠였다. 그 말을 믿고 때를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에 송일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시간의 숲>을 봤다. 한 편의 영화를 끝낸 배우 박용우는 야쿠시마로 여행을 떠난다. 그의 여행에는 일본 여배우 타카기 리나가 동행한다. <시간의 숲>은 야쿠시마에서 보낸 두 사람의 10일간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96분짜리 다큐멘터리는 솔직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대체 이 기분은 뭐지?' 싶은 뜨거운 뭔가가 끓어올랐다.

야쿠시마의 숲은 고요하고 경이롭다. 그리고 침묵의 여운은 길고 강렬하다
 야쿠시마의 숲은 고요하고 경이롭다. 그리고 침묵의 여운은 길고 강렬하다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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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을 이어 온 숲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시간 따위는 왜소하고 부질없어 보였다. 야쿠시마에서 자라는 삼나무의 나이테에서 인간의 일생은 한 뼘도 되지 않았다. 그런 숲에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는 드라마는 애초부터 가당찮은 이야기였다. 숲은 고요하고 경이로웠다. 그 경이로움은 침묵으로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의 숲>은 숲의 이야기 대신 숲의 고요함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침묵의 여운은 길고 강렬했다.

때가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7200년 된 삼나무가 보고 싶었고, 미스터리와도 같은 그 숲이 궁금했고,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고요함 속을 걷고 있을 '내'가 수시로 오버랩 됐다. 야쿠시마를 갈 타이밍은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왔다.

가고시마의 후지산 '가이몬타케'의 도도한 자태

지난 6월 초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가고시마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가고시마시와 야쿠시마를 잇는 고속선 터미널로 곧장 이동했다. 일본의 근대화를 견인했던 사츠마번의 다양한 역사 유적들, 하루에도 몇 번씩 분화를 하는 활화산 사쿠라지마, 텐몬칸거리 특유의 활력, 사탕수수 거래를 독점하면서 만들어진 달콤하고 매혹적인 전통과자들, 흑돼지를 사용해 만든 일본 최고의 돈카츠와 샤브샤브 등 가고시마에는 관광객의 발길을 붙들어 맬 것들이 무궁무진하지만, 이번만큼은 뒤도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야쿠시마만 생각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할 도시락 하나를 챙겨 배에 올랐다.

가고시마항과 긴코만
 가고시마항과 긴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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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항과 야쿠시마의 미야노우라항을 연결하는 고속선은 하루 7번 왕복한다. 중간 기착지 없이 직행할 경우 1시간45분이 걸린다. 가고시마항을 출발한 고속선이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도 여전히 좌우로 육지가 보인다. 바다가 가고시마 내륙 깊숙이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이를 '가고시마만' 혹은 '긴코만'이라 부른다. 전체 운항시간 중에서 이 바다를 벗어나는 데만 절반이 소요된다.

긴코만(錦江灣)은 예로부터 도미, 샛줄멸, 날치, 보리새우 등의 수산물이 풍부했다. 지금은 방어와 잿방어 양식으로도 유명하다. 긴코만의 방어와 잿방어는 도쿄에서조차 으뜸으로 친다. 예나 지금이나 가고시마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바다인 셈이다. 특히 긴코만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해 충청남·북도를 돌아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금강(錦江)'과 같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바다다.

긴코만에서 바라 본 가이몬타케의 도도한 자태
 긴코만에서 바라 본 가이몬타케의 도도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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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창 너머로 가고시마의 후지산이라 불리는 '가이몬타케'의 도도한 자태가 보이면 만을 벗어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리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왼쪽 창 너머로 규슈의 땅끝인 '사타곶'이 보인다. 이제부터 넓디 넓은 동중국해가 펼쳐진다.

굳이 이런 사전지식이 없어도 지금까지 항해한 바다와 앞으로 항해할 바다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방금 전까지 강물처럼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사납게 변한다. 거친 파도가 수시로 창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바다의 심중은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간 변덕스럽지 않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럴 때는 그저 바다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는 것이 요령이다.

잠깐이지만 꽤 깊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배가 미야노우라항에 완전히 정박한 다음 일행이 깨우고서야 잠에서 깼다. 아마도 몇 년을 벼르던 야쿠시마를 드디어 본다는 설렘에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리라.

미야노우라항은 한적했고 야쿠시마의 숲은 구름 속에 그 흔적을 감추고 있었다
 미야노우라항은 한적했고 야쿠시마의 숲은 구름 속에 그 흔적을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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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노우라항(宮之浦)은 전형적이라 할 만큼 작고 한적한 항구였다. 일본 최고의 강수량을 자랑하는 동네답게 하늘은 잔뜩 찌푸린 표정이다.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규슈 최고봉이라는 1936m의 '미야노우라다케'는 고사하고, 30여 개나 되는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해상의 알프스'라는 별칭을 가진 야쿠시마의 웅장함은 끝내 구름 속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항구에서 서성거릴 여유도 이유도 없다. 어차피 자연의 일정은 인간의 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자연의 무심함을 경험적으로 아는 인간은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미야노우라항에서 5분쯤 걸어가면 '야쿠시마 환경문화촌 센터'가 있다.

대형 스크린으로 먼저 만나는 야쿠시마는 오랜 기다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대형 스크린으로 먼저 만나는 야쿠시마는 오랜 기다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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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화촌에서는 매시 20분마다 가로 20m 세로 14m에 이르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야쿠시마, 숲과 물의 심포니'라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약 25분간 상영되는 다큐멘터리에는 야쿠시마의 웅장한 자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실제와 거의 동일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화면에 그에 어울리는 배경음악과 내레이션까지 더해져 사뭇 감동적이다. 비록 어설프긴 해도 한국어 자막까지 있어 나름 도움이 된다.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 '그래, 내가 이 꼴을 보자고 그 세월을 기다렸고, 그 먼 길을 달려왔구나!'라는 확신이 절로 들었다. 비록 구름에 가려 실제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이 정도 영상이면 첫 만남 치고는 손색없는 수준이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아열대·온대·한대의 모든 특징 갖춰

야쿠시마는 마그마가 굳어서 생긴 화강암이 해저 폭발로 융기해 생겨난 섬이다. 그러니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발의 괴력이 대체 얼마나 대단했기에 이토록 거대한 돌덩어리를 해발 1936m나 밀어 올렸는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렇게 높이 솟아오른 덕분에 야쿠시마는 아열대, 온대, 한대의 모든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야쿠시마 환경문화촌 센터'에서는 표고차에 따른 동식물의 수직분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야쿠시마 환경문화촌 센터'에서는 표고차에 따른 동식물의 수직분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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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직경 30km에 불과한 작은 섬에 길이 2000km에 이르는 일본열도를 수직으로 세워 놓은 것과 같은 식물들이 분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일본열도의 자연환경이 옹골지게 채워진 거대한 자연사박물관과 다름없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된 야쿠시마에 대한 일본인의 각별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아마도 한국인이 제주도와 한라산에 대해 가지는 애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선형의 경사로로 설계된 환경문화촌의 전시공간은 야쿠시마의 이러한 자연환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살펴보면 좋겠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현장을 직접 본다. 다큐멘터리만으로도 예습은 충분하니 굳이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대신 한 곳을 더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야쿠시마를 야쿠시마답게 만드는 삼나무, 이름 하여 '야쿠스기'다. 이 야쿠스기를 테마로 한 박물관이 따로 있다. 무릇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느낀다 했다. 야쿠시마의 숲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건 몰라도 야쿠스기에 대한 예습은 필수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니 기발한 지도 한 장이 눈에 띈다. 야쿠시마는 거의 원형에 가까운 오각형의 섬이다. 여기에 착안해 시계처럼 1시부터 12시까지 12방위로 위치를 표시했다. 섬을 운행하는 대부분의 차량에 이런 지도가 붙어 있다.

시계처럼 12방위로 표시된 야쿠시마의 지도는 섬 내 주요 관광지의 위치와 이동시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시계처럼 12방위로 표시된 야쿠시마의 지도는 섬 내 주요 관광지의 위치와 이동시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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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면적의 90%가 숲이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해안가 주변 10%에 불과하다. 이를 따라 섬을 일주하는 130km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따라서 12방위로 표시된 지도는 현재의 위치와 목표지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울러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10분 내외라 이동시간까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야쿠시마에 처음 상륙한 미야노우라항은 1시 방향에 있고 목표 지점인 '야쿠스기자연관'은 4시 방향에 있다. 따라서 섬을 1/4 정도 돌아가고 시간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버스가 미야노우라항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찌푸린 날씨는 기어이 비를 쏟아 냈다. 바닷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르다 야쿠시마의 숲에 부딪혀 내리는 비라고 했다. 수평선과 하늘은 경계가 흐릿하고, 숲은 짙은 안갯속에 그 흔적을 감추고 있었다. 버스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니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궂은 날씨와 달리 더없이 청량했다.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나는 지금 야쿠시마에 있고, 나는 아직 이 섬에 볼 일이 많다.

덧붙이는 글 | 3박4일 동안의 야쿠시마 여행기는 앞으로 총 5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야쿠시마, #규슈, #취생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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