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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나의 가슴에 있다.
나는 모리배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팔을 지배하고 나의
밥을 지배하고 나의 욕심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둔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데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생활과 언어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밀접해진 일은 없다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나의 화신이여
- <모리배>(1959)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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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선생님, 장마철이라 후텁지근한 날만큼이나 우울한 세상사가 사람들을 온통 힘들게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 나라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부터 시작된 정쟁이 한창 휘몰아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 그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가 법으로 엄금하고 있는 대통령 기록물을 멋대로 발췌해 공개해 버렸습니다. 그 후폭풍으로 여야는 지금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 국정원장은 국가 안보를 들먹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정권 보위'가 최대의 관심사인 듯합니다. 아무리 정치가 권력을 중심에 놓고 돌아간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매지구름으로 온종일 우중충했던 오늘, 저는 선생님의 시 <모리배>를 읽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자니, 최근 한 책에서 읽은 김남주(1946~1994) 시인의 작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떤 관료>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김 시인을 잘 모르시지요. 김 시인은 선생님께서 문학으로 전향한 1946년에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전횡을 일삼은 1970~1980년대를 그 어느 누구보다 뜨겁게 살다간 분이지요. 조금 길지만 그 작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관료의 주인은 "봉급을 주는 사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 근면하고 정직하게! /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 시인의 반어적이고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리시는지요. 그 안에 담긴 매서운 꾸짖음이 말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다를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 시에 담긴 '그'를 존경과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겠지요. '그'의 근면과 정직과 공정과 충성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한때 '그'의 고향에서는 출세한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살던 마을의 근동에 있는 아이들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워가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이런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그'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한다고 할 때, 과연 '그'가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생각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모습에서, 선생님께서 이 시에서 말한 '모리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을 들어보셨는지요. 성실하기 그지없던 그는 나치의 '최종 해결', 곧 유대인 학살 명령을 받고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한 전범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그가 그런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세 가지의 이유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을 들었습니다.

모리배들, 모범적이었지만 불우했던 공무원?

모두가 맞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는 과연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정말 형편 없었을까요. 정녕 우리는 그를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인, 불운한 시대의 '모범적이었지만 불우했던 공무원'으로 봐야 할까요.

영국 사학자 데이비드 세사라니(David  Cesarani)가 그 의문에 해답을 던져줍니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과 같이 집단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뇌아차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명령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세사라니는 그들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한 후에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가항력적인 시대 상황이나 자신의 '밥그릇' 때문에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자들을 대변하는 소리를, 우리는 과거 청산이 이슈가 될 때마다 지금까지 빠짐없이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나의 가슴에 있(1연 1행)"는 '언어'의 '단련'을 '모리배들'에게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리배들'은 "나의 팔을 지배하고 나의 / 밥을 지배하고 / 나의 욕심을 지배"(1연 4·5행)하고 있습니다. '나'의 속속들이 내면과 일상의 삶을 온통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지독한 그들은, 선생님께서 그 표지가 해지도록 읽은, '하이데거'의 책을 볼 때조차도 머릿속을 파고들었던가 봅니다. 오죽하면 선생님께서 (모리배의-기자 주) "생활과 언어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 밀접해진 일은 없다"(2연 4·5행)고 말씀하셨을까요.

최인규라는 사람을 잘 아시겠지요. 1959년 5월 치러진 민의원 선거에 42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된 후 예산결산위원장·교통장관 등의 요직을 맡은 후, 불과 몇 달 만에 내무장관으로 특별 기용된 이승만 독재정권의 '성실한' 관료였지요. 당시 그는 자유당 안에서, 1960년에 치러질 정부통령 선거에서 '최후로 써먹을 총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승만의 충복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실제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총책으로 그 이름을 드날리게 됩니다. 그 최인규가 내무장관 취임사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경찰관과 일반 공무원은 이 대통령 각하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 최인규와, 2012년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2013년의 남재준 국정원장을 똑같은 부류로 보면 너무 지나칠까요.

모리배들을 조종하는 '루시퍼'를 생각한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부근 동아일보사앞에서 열린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대학생·시민 촛불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규명,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구속, 박근혜 대통령 책임 등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부근 동아일보사앞에서 열린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대학생·시민 촛불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규명,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구속, 박근혜 대통령 책임 등을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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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김남주 시인이 위의 <어떤 관료>에서 묘사한 '그'와, 아렌트와 세사라니가 분석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모두 선생님께서 이 시에서 말한 '모리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공직 생활을 하고, 아이히만이 "상당한 열정과 섬세함"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했을 때, 단지 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겠기에 말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세사라니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온통 자신의 출세와 안위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는지요.

저는 지금 선생님께서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 나의 화신이여"(3연 4·5행)라고 외친 마지막 연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일상의 굴레에 갇혀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 안의 '그'와 '아이히만' 그리고 이들을 조종하는 사악한 '루시퍼'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모리배>, #김수영, #김남주, #<어떤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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