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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군산영광여고 2학년 5반의 학급 문집인 <흐르는 강물처럼>의 발간 경위에 대한 간단한 보고글입니다.

며칠 전(4일) 우리 반은 지난 한해 학급 살림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조촐하게 통닭잔치를 벌였습니다. 교내 모 행사에서 우승하여 탄 상금과 제가 낸 약간의 찬조금 그리고 아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학급비를 합했지요. 우리를 위해 닭 7마리가 헌신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통닭을 뜯어먹으며, 그리고 지난 한해 우리의 자잘한 일상을 기록한 학급 문집을 훑어 보며, 모두들 유쾌하게 깔깔거렸습니다. 참! 뜻있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 반 학년 마무리 잔치 풍경. 아이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통닭을 먹으면서 학급 문집 <흐르는 강물처럼>을 훑어보고 있다. 아이들이, 각자의 사소한 일상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어내는 일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하는 눈을 넓히는 데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기를 바란다.
 며칠 전 우리 반 학년 마무리 잔치 풍경. 아이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통닭을 먹으면서 학급 문집 <흐르는 강물처럼>을 훑어보고 있다. 아이들이, 각자의 사소한 일상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어내는 일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하는 눈을 넓히는 데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기를 바란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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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저는 학급 문집의 기본 취지를 아이들이 꾸려가는 일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두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곳의 매 순간에 있습니다. 그 순간의 자잘한 일상이 모여 하나의 생애를 완성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아이들이 날적이를 통해 생활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자신의 한 해를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학년 초 첫 학급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학급 회의를 해서 학급 교훈을 정하고 자치 규칙을 마련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실장과 부실장이 결과물을 손에 들고 왔습니다. 가져온 급훈을 보니 '거울 보고 살자'였습니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속뜻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함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올 한 해 날적이를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날적이'는 '일기'를 우리 고유어로 표현한 말입니다. 일기는 앞을 보고 달리기만 하는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찬찬히 응시하듯이 말이지요. 그런 말을 건네면서 아이들에게 학급 날적이를 소개했습니다. 홀수 날적이와 짝수 날적이 공책을 마련해 줄 테니 하루에 한 명씩 자신을 돌아보는 일기를 쓰자고 말이지요. 그렇게 날적이 공책에 쓰인 글들은 해밑 즈음에 나올 우리 반 문집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에 쑥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학기 초라 서로 서먹서먹한 상황이어서였지요. 수 년만에 처음으로 일기를 써 본다는 녀석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아낌없이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것이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소통하기 위한 작지만 소중한 수단임을 잘 알았던 것이지요.

날적이를 쓰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1학기 말에 날적이 공책이 실종된 적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자신의 차례가 된 줄 모르고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한 녀석이었습니다. 거의 두 달여의 실종 기간은 상당히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아이가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어떤 날은 날적이 쓰기에 불이 붙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글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헉헉거리며 글을 쓰면서도 모두들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요. 아이들은 그렇게 친구와 함께 글을 써가는 일의 재미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길거나 짧은 글 150여 편이 날적이 공책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쓴 부모님 평전과 학급 문고의 독서 후 기록물도 40여 편 가까이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좀더 다양하고 많은 글을 실을 욕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너무나도 바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매일을 시간에 쫓기며 전쟁을 치르듯이 보내는 아이들에게 글을 써 내라며 무작정 다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내는 학급 문집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초임 5년 간은 얼떨결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후로는 담임을 대략 1, 2년을 사이에 두고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좀더 자주 담임을 맡았다면 더 많아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올해 우리 반의 학급 문집인 <흐르는 강물처럼>의 표지 사진. 문집 제목은, 아이들이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곁을 스쳐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 모든 순간순간이 모여 우리의 생애를 이루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올해 우리 반의 학급 문집인 <흐르는 강물처럼>의 표지 사진. 문집 제목은, 아이들이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곁을 스쳐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 모든 순간순간이 모여 우리의 생애를 이루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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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문집이 처음으로 나온 해는 2학년 7반 담임을 맡았던 2007년이었습니다. 그 후 2년 만에 1학년 5반을 맡으면서 <흐르는 강물처럼> 통권 제2호가 2009년에 나왔지요. 2010년에는 세 번째 학급 문집이 나올 뻔했습니다. 2학년 4반 담임을 맡은 해였지요. 저는 담임을 맡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이 해에도 학년 초부터 아이들이 날적이를 부지런히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2학기에 학습 연구년 대상자로 선발되었습니다. 일종의 휴식년을 갖게 된 것이지요. 외국으로 교육 탐방을 나가고, 대학과 연계하여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하게 되면서 학교를 한 학기 동안 쉬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는 아쉽게도 문집을 묶어내지 못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지낸 지난 십여개 월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과 더 많이 소통하지 못하고, 좀더 따뜻하게 아이들을 대하지 못한 기억만 오롯합니다. 그나마 소박한 이 문집을 내게 되었으니 올해도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아이들이 자잘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집이, 그 일의 일부를 조금이나마 해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힘을 얻어 봅니다.

교사로서, '꿈'과 '희망'이라는 '무기'로 아이들을 다그치면서 부끄러워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사가 아무 대책 없이 아이들 앞에서 힘주어 말하는 꿈과 희망은 아이들을 질식하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상 꿈과 희망조차 돈을 주고 특강을 다니며 '사야 하는' 세상이 돼버렸지 않은지요.

그저 평범한 삶 속에서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꿈과 희망을 말하는 일이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욱 꿈과 희망을 이야기해야겠지요. 그 출발점이 자신의 현재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데 있음은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들에 힘입을 때라야 공화국의 기틀 또한 튼튼해지지 않을런지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학급 문집,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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