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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천이 나무 뒤에 가려 있다.
▲ 문소루에서 바라본 의성읍의 풍경 남대천이 나무 뒤에 가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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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의 역사유적과 지리를 한눈에 살펴보기 위해 금성산에 올랐듯이, 의성읍에서는 구봉산을 오른다. 봉우리가 아홉 개라고 구봉산이라 부르지만, <의성 관광> 홍보책자에 이름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산이다. 하지만 문화유산도 있고, 의성읍 전경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두 곳의 전망대(문수루, 봉의정)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꼭 올라야 한다.

구봉산 북쪽 절벽 아래로는 남대천이 흐른다. 문수루에서 바라보면 남대천 너머가 바로 의성읍 중심부이다. 맨 왼쪽으로 '의원'이 먼저 보이고, 시가지 중심부에 의성향교가 여러 채의 기와집들을 뽐내며 우뚝 서 있다.

의성읍 전경 보려면 구봉산 문소루나 봉의정이 제격

그렇다면 '義城'이라는 이름을 낳은 홍술 장군 비석은 그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겠구나! 혼자 그렇게 짐작을 해본다. 자그마한데다 울창한 숲에 가려 있어 홍술장군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공기가 있는 것처럼, 망원경 없이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아도 홍술장군비는 분명히 의성향교 북쪽 무당골 숲속, '의원'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의원(義苑)'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의성군은 안계평야 등지에서 생산되는 향토의 쌀에 '의로운 쌀'이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의성종합운동장 뒤뜰을 '의(義)로운 뜰[苑]', 즉 '의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 곳은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충혼탑 등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거룩한 선열들을 기리는 여러 탑이 세워져 있는 동산이니, 그렇게 우러러 부르고도 남을 만한 답사지이다.

멀리서 바라본 문소루
 멀리서 바라본 문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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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읍 전경이 잘 보이는 지점은 구봉산 중에서도 문소루와 봉의정이다. 문소루와 봉의정은 구봉산의 끝과 끝을 이룬다. 의성읍 시가지나 남대천에 볼 때 봉의정은 가장 높은 동쪽 끝 정상, 문소루는 가장 낮은 서쪽 끝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그래도 문소루는 의성읍 전경을 잘 보여준다. 문소루라는 이름은 의성 일대의 옛 이름 문소군에서 따왔다. 의성 일대는 본래 '조문국'이었지만 757년 신라 경덕왕이 '문소군'으로 개명(바꿀改이름名)한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이 '의성'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내린다. 하지만 고려 때 지어진 누각에는 '의성루' 아닌 '문소루'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는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안동의 영호루가 각각 진주루, 밀양루, 안동루가 아닌 것과 같다. 그렇게 재미없는 이름을 누각에 붙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영남 지역 4대 누각 중 가장 먼저 지어진 문소루

문소루는 앞에 든 3대 누각과 더불어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로 명성을 날렸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어졌다. '교남'은 영남 지방을 일컫는 말이므로, 문소루는 영남 지방의 이름 높은 누각들 중에서 가장 맏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657년(효종 8) 불에 타 목숨을 잃었고, 1694년(숙종 20) 의성현령 황응일(黃應一)이 중건(重建)하지만 1950년의 6·25 때 다시 불에 타 죽었다. 외적이 난동을 부린 임진왜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잘 견뎌낸 '보물' 문소루가 인재(人災)와 동족상잔(同族相殘)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때 영남 지방의 4대 누각으로 일컬어졌던 문소루.
▲ 문소루 한때 영남 지방의 4대 누각으로 일컬어졌던 문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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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소루는 1983년 9월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불 타기 이전에 있었던 읍내의 '본적'을 찾지 못하고 지금의 구봉산 서쪽 끝 야트막한 기슭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가장 낮은 곳인데도 의성읍 전경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니, 새집 자리로는 썩 잘 골랐다고 하겠다.

문소루는 누각이니 우리말로는 다락집이다. 당연히 사다리를 밟고 올라야 2층격인 마루에 도달할 수 있다. 문소루 2층에 올라 의성읍 전경을 구경한 다음, 내려와 오른쪽으로 산을 오른다. 물론 가지고 온 자동차가 있다면 남대천을 건너 읍 안으로 들어간 다음, 우회전하여 다시 남대천을 건너 수도사와 소원정 앞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다시 봉의정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의성읍은 '시'가 아닌 '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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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의정에서 내려다 본 의성읍 여전히 의성읍은 '시'가 아닌 '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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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루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걸으면 구봉산 동쪽 정상인 봉의정에 닿는다. 능선을 타고 펼쳐지는 이 길을 의성군에서는 '구봉자연휴양림'이라 한다. 그만큼 시원한 숲과 아름다운 길이 일품이다. 중간쯤에 충혼탑이 있던 터가 있고, 체육공원을 지나면 금성산에서 옮겨온 화산석으로 꾸민 '소망공원'이 나타난다. 봉의정은 소망석에서 200m가량 떨어진 꼭대기에 있다.

봉의정은 근래에 세워진 콘크리트 팔각정인 탓에 문화재는 아니다. 다만 의성읍 전경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읍내 답사를 출발하기 이전에 먼저 방문할 만한 가치는 있다. 아까 문소루에서 볼 때는 '의원'이 중심에 보였는데, 여기서는 의성향교 방면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온다.

금성산 화석바위 옮겨와 조성한 소망공원

봉의정에서 만난 중년의 한 남성이 사진기를 든 필자에게 "어디서 왔니껴?"하고 묻더니, "소망석 봤니껴? 구봉산에서는 그게 제일이니더"하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는 의성을 잘 소개해 달라는 당부인사까지 한다. 의성에 사는 자긍심이 가득 담긴 장년의 얼굴빛은 시원하고 당당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인 금성산에서 옮겨온 화산석들로 소망공원을 꾸몄다.
▲ 의성읍 구봉산 소망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인 금성산에서 옮겨온 화산석들로 소망공원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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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의정 조금 아래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인 금성산에서 옮겨온 검고 커다란 바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화산바위 사방으로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울타리 앞에는 '소망공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위에는 두 손을 모아 무엇인가를 기원하는 자그마한 조각이 얹혀 있다. 과연 무엇을 비느라, 누가 언제 이렇게 화산바위들을 이곳에 옮겨놓은 것일까. 바위들 정면의 시비(詩碑)처럼 보이는 빗돌을 읽어본다.

소망석

이 소망석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날
한반도 태초의 화산인
금성산에서 옮겨온 것으로
한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8만 군민과 50만 출향민의
소망과 염원을 한데 모아
의성인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 의미를 후세에 길이길이
물려주려 한다.

서기 2001년 1월 1일
의성군수 정해걸

2001년은 '새 천년'의 첫 해였다. 1000년, 2000년, 그리고 2001년을 맞아 '새로운 천년'을 사람들은 당시 그렇게 불렀다. 해마다 1월 1일을 맞아 이런저런 소망을 비는 일은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니, 의성군이 이곳에 화산바위들을 설치하고 이렇게 소원을 비는 글을 적어놓은 것은 민의(民意)를 대변한 바람직한 행정이라 하겠다. 그런 뜻에서 이곳은 조금 전에 만난 장년의 남자가 자랑할 만한 멋진 방문지인 셈이다.

오천송을 기리는 비석은 이 누각의 오른쪽 뒤편(사진에서 볼 때는 은행나무 뒤)에 있다.
▲ 소원정 오천송을 기리는 비석은 이 누각의 오른쪽 뒤편(사진에서 볼 때는 은행나무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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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석 아래 체육공원에서 남대천으로 가는 내리막 산길을 걸으면 수도사가 나오고, 그 절 앞에 소원정(溯源亭)이 서 있다. 이 누각은 조선 숙종 때의 효자 선비인 오천송(吳千松, ?∼1639)을 기려 세워졌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탓인지 누각은 좀 쓸쓸해 보인다. 게다가, 한창 왕성하게 자랐을 때에는 '밑둥부터 비틀리게 자라는 모습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는 안내판의 설명처럼, 한때는 정말 위풍당당했을 것 같은 150년 묵은 향나무가 이제는 지친 것인지 바짝 마른 몸으로 힘들게 벼랑 끝에 버티고 있는 모습 때문에 소원정은 더욱 초췌하게 느껴진다.

용은, 뱀이 1천년을 참고 견뎌 살아남아 드디어 하늘로 오를 수 있을 때 태어나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만큼 소원정 향나무는 지금 남아 있는 줄기만 보아도 한창 때에는 용과도 같은 대단한 꿈틀거림을 자랑했던 나무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향나무는 태풍과 폭설을 물리치기에 힘이 부친 것일까, 1천 년을 힘차게 살아가지 못하고 그만 늙어버렸다. 그래도 소원정 옆에는 꿋꿋이 그 누각의 영광을 지원하는 그 무엇이 있으니, 누각 오른쪽에 남아 있는 '오천송수려(守廬)유허비'가 바로 그것이다.

의성읍이 낳은 대표적 효자 오천송

비석에 수려(守廬) 두 글자가 나오는 것은 오천송이 풀집[廬]을 짓고 살았다는 뜻이다. 의성군 홈페이지를 보면 오천송은 '여막을 짓고 등 너머 있는 친산(親山)과 읍내에 계시는 어머니의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위해서 중간 지점을 택하였다. 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남에 하늘에 기도하여 무사히 월천하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고 적혀 있다. 여막은 대충 지은 움막 정도를 뜻하고, 친산은 부모의 묘소를 말한다. 혼정신성은 '아침 저녁으로 살피고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월천(越川)은 '강을 건너다'의 의미이다.

홈페이지의 설명을 쉽게 풀어서 읽어보자.

오천송은 아버지의 묘가 있는 구봉산 너머와 어머니가 계시는 읍내의 중간쯤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묘소도 지키면서 동시에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남대천 물이 크게 불어났다. 그는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지극한 효심에 하늘도 감동한 것인지 문득 강물이 좌우로 좍 갈라졌다. 그는 남대천을 무사히 건너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남대천(南大川)이라면 '남쪽에 있는 큰 강'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남대천은 결코 넓은 강이랄 수 없지만, 홍수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옛날 사람들에게는 남대천도 대단한 강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오천송이 읍내의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남대천을 건넜듯이 우리도 물을 건너 의성 읍내로 들어가 보자. 물론 지금은 좁기는 해도 다리가 놓여 있으니 기도를 해가면서 건널 것까지는 없다.

땅 위로 솟구친 뿌리가 장관이다.
▲ 의성 읍내 한복판에 있는 수령 600년 된 회화나무 땅 위로 솟구친 뿌리가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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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천을 건너 읍내 안으로 들어서면 금세 기념물 2호인 회화나무가 나타난다. 높이 18m, 밑둥치 15.3m, 가슴높이 둘레 10m를 자랑하는 고목이다. 주소가 '의성읍 도서리 210-3호'인 이 회화나무는 지금 자리에서 600여 년을 살았다. 그 동안 남대천의 맑은 물을 마시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하다.

이 회화나무는, 우리나라[朝鮮]에 있는 오래되고[老] 크고[巨] 이름난[名] 나무[樹, 木]를 모아 1919년에 발행한 책[誌]인 <朝鮮老巨樹名木誌(조선노거수명목지)>에 실려 있는 208그루 회화나무 중에서도 가슴높이 둘레가 남북한 통틀어 가장 큰 거목이다. 1972년에 나온 <保護樹志(보호수지)>에도 국내에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 360그루 중 으뜸이라 하였다.

회화나무는 8월에 황백색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가 익는다. 콩과에 들어가는 나무로, 낙엽(落葉)‐활엽(闊葉)‐교목(喬木)이다. 꽃과 열매는 약으로 쓰인다. 특히 열매는 초를 켤 때 쓰는 기름으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공부하는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방향으로 가지를 쭉쭉 뻗고 열매는 촛불을 켜는 데 쓰이는 회화나무처럼, 많은 공부를 하여 세상을 밝히는 선비가 되라는 의미였다.

왕이 신하에게 나무를 선물로 줄 때에도 회화나무를 하사했고, 집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옛날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담장 안에 즐겨 길렀다. 의성 읍내 한복판에 지금처럼 600년이나 된 우리나라 제일의 회화나무가 남아 있는 것도 아마 그런 까닭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선비'의 상징 회화나무

나무를 둘러보니 특히 뿌리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물론 600년이나 된 나무인 만큼 땅속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드리웠겠지만, 흙 위로 솟구쳐 올라와 있는 부분만 해도 굵기와 크기가 하마만 하다. 게다가 이끼들이 파랗게 온몸을 에워싸고 있어 뿌리는 물론 나무의 껍질이 본래 무슨 색깔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다. 600년 긴 세월의 짙푸른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느낌이다. 이 모습을 보고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따뜻한' 답사자라 할 수 있겠는가. 사진기를 든 채 회화나무 사방을 빙빙 돈다.

회화나무에서 북쪽으로 길을 따라 읍내 중심부로 들어서면 가게마다 마늘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서 '의성이 우리나라 최고의 마늘 생산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마늘시장'이 나온다. 이곳은 사시사철 마늘을 파는 시장이다. 길 양편으로 쌓여있는 마늘들이 풍겨주는 향기를 맡으며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다. 아직 의성 읍내에는 볼 것이 많다.

문소루에서 오른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소망공원 가는 중간쯤에 호석(護石)처럼 보이는 돌로 둥글게 에워싸인 유적지(?)와 만난다. 옛날 무덤 자리인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고,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가 읍내로 옮겨간 뒤 터만 남은 흔적이다. 그 내력을 적은 작은 빗돌이 (사진 앞면 가운데에 보이는 것처럼) 세워져 있다.
▲ 충혼탑이 있던 자리 문소루에서 오른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소망공원 가는 중간쯤에 호석(護石)처럼 보이는 돌로 둥글게 에워싸인 유적지(?)와 만난다. 옛날 무덤 자리인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고,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가 읍내로 옮겨간 뒤 터만 남은 흔적이다. 그 내력을 적은 작은 빗돌이 (사진 앞면 가운데에 보이는 것처럼)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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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의성여행,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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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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