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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손에 들지 않고 어떤 사물을 보는 것과
그것을 그리려고 같은 사물을 보는 것과의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들은,
그러한 경우 두 개의 전연 다른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P. 발레리'

"권진규 선생님의 조각을 보면 어떤 날엔 아주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어떤날엔 인자한 미소를 띤 할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소중한 느낌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권진규 선생님의 조각을 보면 어떤 날엔 아주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어떤날엔 인자한 미소를 띤 할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소중한 느낌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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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닝 바람으로 어슬렁 걷다가 명화 만나다

지난 15일 는개인지 안개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가는비가 내렸습니다. 저녁밥 먹고 그냥 TV 보며 시간보내기 아까워 추리닝 바람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빗속을 하염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해운대 중동 소재 E 슈퍼마켓이 있는 근처에서, 예전에 보지 못한 프랑스 그림엽서처럼 예쁜 화랑의 불빛을 발견했습니다. 

내 발길은 마치 자석처럼 끌려 화랑 앞에 멈추었습니다. 대부분의 도심에 자리한 빌딩숲에 밀집한 상설 화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화랑 현관 앞에는 제법 큰 문화 행사를 열 수 있을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용도의 옛날 맷돌들이 운치 있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마침 초등학교 학생 서넛이 어울러 유리 전시관 안의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너무 낯이 익은 화가 장욱진 선생의 그림이었습니다. 나로서는 큰 행운을 만난 듯 했습니다.

솔직히 난 장욱진 선생의 그림을 책으로만 익히 보았기에 말입니다. 그때 하얀색 상의를 입은 여성 한분이(나중에 알고 보니 아인 갤러리 박정현 대표) 내게 다가왔습니다. "...안에도 그림이 많아요. 차도 한잔 하고 천천히 구경하고 가세요." 라는 청에 화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턱 없는 동네 사랑방 구실의 공간, 아인 화랑
 문턱 없는 동네 사랑방 구실의 공간, 아인 화랑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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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또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권진규 선생의 조각품 두어점이 전시 되어 있었습니다. 권진규 선생은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작년인가 덕수궁에서 권진규 조각작품 전시회가 있었으나 관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 오늘 저녁은 억세게 운이 좋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갤러리 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권진규 선생의 조각품 외에도 우리나라의 대표 화가로 꼽을 수 있는 장욱진, 유영국 작품 외 도자기 및 고가구 등이 어느 집 거실에 들어온 듯 친밀하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우문현답인 줄 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 정말 진짜들 맞나요?"

내 무례한 질문에 화랑 대표 박정현 씨는 그저 조용히 웃기만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있나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그녀에 대한 이런 저런 궁금증들이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 없이 이것 저것 물어본 즉석 인터뷰 형식을 재구성해 요약 정리해 봅니다.

전업주부에서 화랑 대표가 되기까지

- 화랑을 연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나는 3개월 전만 해도 전업주부였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엄마 손이 가지 않아도 알아서들 할 나이가 되니, 어릴 적부터 올케 언니(고 이윤희 화가; 중앙미술 대전 특선,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며, 올케 언니와 함께 전시회를 다니면서 막연하게 나중에 커서 화랑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비로소 실천으로 옮기게 된 것 같습니다.

그간 전업주부로 부산에 살면서, 서울 중심으로 열리는 크고 작은 전시회 감상 기회가 턱 없이 작아지고, 또 주부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구할 기회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해서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그림을 좋아하는 주부들을 위해 내가 직접 겪은 이러한 애로점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소장하려는 주부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좋은 조력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윤희 화가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세요

"올케언니(이윤희 화가)는 한국화 화가(서울대 졸업, 파리 소르본느 대학교 박사 과정 수료, 가람문화예술센터 개관 1주년 초대개인전 등) 입니다. 내가 어릴 적 올케 언니가 시집을 왔어요. 그래서 언니에게 받은 그림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봅니다.

전 그러나 그림의 재능은 없어서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 올케 언니와 함께 숱하게 전시회에 다니면서 그림을 감상했어요. 그러다보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한점 두점 사기 시작했어요.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그림을 소장하였지요. 그런데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좋은 그림을 나만 감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그러니까 올케 언니와 어릴 적 화랑을 드나들면서 키운 꿈을 이제야 이룬 셈입니다.(웃음)

그림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영혼의 거울이다
 그림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영혼의 거울이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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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안목은 마음의 욕심을 비우는 일 ...

-아인이란 갤러리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

아인(我印)이란 한자로 풀이하면 나를 확인한다는 뜻, 나를 찾는다는 뜻으로 풀이 될 수 있습니다. 화랑의 개관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설렜는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화랑은, 남들에게 이름이 없이 그저 아줌마로 불리면서 살아온, 이 전업주부에게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게 해준 고마운 공간이라는 의미의 뜻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다행히 이런 내 심정을 남편이 잘 이해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화랑일은 내 전공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서, 살림살면서 세계미술사, 미술의 이해, 미학 관련 책 등 구입해서 고시생처럼 공부를 했습니다.(웃음)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림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은, 미술 이론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그림을 구별하는 눈은 마음의 욕심은 비워야 하는 것 같아요. 이 공간을 가지면서 난 특별히 큰 욕심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갤러리 공간이 아파트 단지 안에 있으니  이 지역의 문화사랑방 구실의 역할도 톡톡히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웃집에 나들이 온 것 같네
 이웃집에 나들이 온 것 같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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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명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부로서 고가의 그림을 사는 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

"(웃음) 사실 이런 질문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질문할 때마다 대답하기가 난처했어요. 제 주위의 주부들은 내가 돈이 많아서, 지금의 고가의 그림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돈이 많아서 고가의 그림을 소장케 된 것은 아니랍니다. 단지 그림이 정말 좋아서 전시회에서 1점 1점 구입하게 되다보니 작품 값이 상승한 것이지요. 내가 소장한 그림들은 하루 이틀에 구입한 것이 아니랍니다.

만약 어떤 주부가 그림을 소장하는 취미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 비싼 그림을 찾지 말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소장하라고 말할 겁니다. 저의 경우는 그림을 좋아하는 만큼, 대신 집안살림뿐만 아니라 화장품이나 옷, 가방 등 쓰던 것을 쓰고 검소 절약을 생활화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림을 꼭 돈 많은 사람만이 구입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우리사회가 시정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봤습니다. 유명한 피카소의 작품이 뉴욕의 한 경매소에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천188억 원(1억 640만 달러)에 낙찰됐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한 '누드, 녹색 잎과 앞가슴'(피카소 전성기인 1932년 작품)인데, 미국의 한 미술품 수집가 부부가, 1951년 화가 피카소에게서 1만 9천800 달러에 구입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동서양 화가들을 막론하고 이름이 나지 않는 화가의 경우 그림이 팔리지 않는 현실입니다. 지금은 고가의 화가 박수근 이중섭 등도 살아생전 그림 재료를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의 미술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술품의 유통은 국민들의 문화지표를 향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정의 경제권을 주도하고 있는 주부층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물론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림은 무슨 그림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먹고 살기도 어려울 만큼 힘든데, 그림만을 위해 평생 가난과 질병과 싸운 고흐의 그림 값이, 오늘날 세계 미술 시장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삶과 예술은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언제 어디서나 문화예술이 공기처럼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각
 조각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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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이 그림에 대한 안목을 어떻게 넓힐 수 있을까요 ?
" 그림을 보는 안목은, 음악가 모차르트의 말처럼 '보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적용될 것입니다. 전시회의 문턱이 닳도록 다녀야 하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부들이 그림을 투자가치로 보거나, 경제적인 여력을 과시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그보다는 정말 느낌이 좋은 그 그림을 마음의 그림처럼 들여다 보고 그 그림의 화가의 생각을 이해하게 될 때, 그 그림의 소장 목적도 달성되고, 그림을 보는 안목도 차츰 높아간다고 생각해요.

- 앞으로 화랑 운영 계획에 대한 특별한 게 있나요 ?

"사실 이건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는 계획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실현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화랑이 자리한 위치가 아파트촌인 만큼 두어달에 한번씩 이 지역의 주부들과 아이들을 위한 삶과 문화가 만나는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싶어요.

이를 테면 시와 그림의 만남, 그림과 영화의 만남, 그림과 음악의 만남 같은, 지역민들이 추리닝 바람으로도 가볍게 골목길을 나와 문화예술을 관람할 수 있는 동네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런 내 의도를 지역민들이 도와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나를 옛날로 부르는 것들...
 나를 옛날로 부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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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감상은 내 마음의 거울들여다보기

- 정말 좋은 그림은 어떤 그림이라고 생각하나요 ?

"흔히 좋은 그림은 유명세를 타는 화가의 그림이라면 고정관념을 갖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예술로 생각하기보다 투자가치로 생각하는데요. 이런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술품은 인간의 사상과 그 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거울은 곧 개인의 자아를 만나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어린시절 올케 언니(고 이윤희 화가)의 그림을 늘 들여다 보고 혼자 잘 놀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림은 아무도 채워지지 않는 듯한 달항아리로 나의 마음을 늘 여유롭게 해주는, 자아 찾기의 거울 같았습니다.

이것이 또 미술품의 의의가 아닐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권진규 선생의 조각을 좋아하고, 자주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어떤 날엔 아주 슬퍼보이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인자한 미소를 띤 할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음의 느낌에 따라 다가오는 그림의 세계로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떤 그림이든 안 좋은 그림은 특별히 없다고 봅니다. 이런 내 느낌을 동네 이웃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말 겁없는 아기의 첫걸음마처럼 아직 화랑 대표로서 서툴지만, 지역민들의 문화공간으로서 노력을 하겠습니다. 또 대신 지역민들의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갤러리
 갤러리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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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아인 화랑 관람 시간 및 기타 문의는, 051-747-2612



태그:#박정현, #아인 화랑, #동네, #권진규 조각가, #주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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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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