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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직접 설계도면을 그리는 아내
 직접 설계도면을 그리는 아내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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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후배에게 땅을 구입해 졸지에 대지주가 됐다고 고해성사를 했더니 걱정스런 눈빛으로 정곡을 찔려왔습니다.

"살집은 구했슈?"

맘에 쏙 드는 터를 구했지만 문제는 보금자리였습니다. 유목민처럼 텐트를 쳐놓고 처자식과 맨땅에서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통나무 주택을 짓고 있는 처남이 땅을 구하는 대로 남아도는 목자재로 함께 보금자리를 마련하자 했지만 '땅 구했으니 집 좀 지어 주세요'라고 말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집을 지을 만한 자금도 없었습니다.

"일단 내가 먼저 고흥에 내려가서 어떻게 해 볼려고 하는디 돈이 문제지 뭐."
"아이구 성님이 언제부터 돈 걱정을 했데요. 그동안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사셨잖아요."
"그러게 말여, 뭔가 생기니께 더 머리 아픈 거 같혀. 땅 없을 때가 좋았는디. 인저 내가 했던 말을 되돌려 받는 구먼."

그 어떤 행위든 말이든 주는 대로 되돌려 받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뭐가 그리 잘났다고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주절거리곤 했습니다. 뭔가를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는 게 더 힘들어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결국 내가 그 판에 끼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숨통 트이는 게 있었습니다. 10여 년 쯤에 시골 빈집을 구해 이사 오면서 아파트를 처분한 자금을 가까운 사람에게 빌려 줬다가 사업체가 부도를 맞는 바람에 되돌려 받기 난감했었는데 땅을 구하러 다닐 무렵 2천만 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돈을 합쳐 땅을 구입하고 아내의 통장에 남아 있는 자금은 3천만 원이 전부.

어떻게 되겠지 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빈집을 구하지 못하면 컨테이너 박스 두 개를 이용해 당장 살림집을 마련해 1년이든 2년이든 시간을 두고 열 댓 평의 삼 칸 집을 지으면 될 것만 같았습니다.

먼저 다 낡아 덜덜거리는 열댓 살 먹은 갤로퍼 승용차를 중고 트럭으로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트럭이 있으면 이삿짐을 옮기는데 큰 돈 들이지 않아도 되고 나중에 생활이 어려우면 짐 실어 나르는 개인용달업을 할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계획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벌게 가지고 중고차 매매 시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낡은 갤로퍼 승용차와 맞바꿀 만한 중고 트럭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 계획은 현실감각이 무딘 내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낡은 갤로퍼 승용차를 중고차 시장에 내놓았더니 80만 원 밖에 쳐 줄 수 없다하고 쓸만한 중고 트럭은 4~5백만 원 이상을 줘야 했습니다. 중고 트럭 수출이 호황이고 거기다가 경제 사정이 최악이다 보니 다들 중고 트럭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구입하고 당장 달려가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화중지병, 그림 위의 떡이었습니다. 일단 중고 컨테이너부터 구해 보자는 심사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처남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연락이 늦었네, 여주에 올라와서 집 지을 자재부터 챙겨 보게."

한껏 들뜬 아내가 설계도면을 그리기 시작

처가에 쌓여 있는 목재
 처가에 쌓여 있는 목재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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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에 있던  세면대. 아내는 처남이 통나무 주택을 짓다가 남은 자재들, 타일, 전기재료 하물며 변기 뚜껑에서 못에 이르기 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처가에 있던 세면대. 아내는 처남이 통나무 주택을 짓다가 남은 자재들, 타일, 전기재료 하물며 변기 뚜껑에서 못에 이르기 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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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 있는 처가에는 집 짓는 목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사위를 늘 반겨 맞아 주는 장모님과 처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우리가 쓸 목재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내는 어지간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창고에 굴러다니는 쓸만한 창호며 문짝 등을 비롯해 하물며 못이며 수도꼭지 하나하나까지 챙겼습니다. 이것저것 챙겼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자재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며 집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자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기둥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땅을 단단하게 다져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바탕,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보통 천만 원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걱정 말게, 자네하고 둘이서 죽었다 생각하고 일하면 될 거네. 내가 따로 생각한 공법이 있으니까 기초공사에 큰 돈 들이지 않아도 돼. 집 짓다가 일손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때그때 사람 쓰면 되고."

통나무 주택을 짓는데 이골이 난 처남이기에 목조주택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저것 부족한 것을 메우고 하다보면 최소 3천만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다 털어 놓아야 할 처지였기에 애초에 계획했던 중고 트럭은 고사하고 어느 정도 뱃길을 익히고 난 다음에 구입하려 했던 중고 낚시 배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습니다.

"그냥 열댓 평 정도로 짓죠 뭐."
"에이 무슨 소리야, 삼십 평 정도는 돼야지."
"본래 컨테이너 박스 갖다 놓고 생활하면서 초가 삼 간 짓듯이 하려고 했는디, 우리 형편에 삼십 평은 너무 큰디요."
"애들도 다 컸는데 걔들 방도 따로 있어야 하질 않나?"
"그래도 삼십 평은 너무 큰 디..."

공주 시골집으로 돌아와 한껏 들뜬 아내는 당장 설계도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십 평은 너무 크지 않어? 돈도 부족한데..."
"그래두 최소한 삼십 평은 돼야지. 오빠가 지어 주겠다고 하잖아."
"그동안 이십 평도 채 안 되는 집이지만 널널하게 잘 살았잖어."
"그거 하고 다르지."
"집 없는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겠어. 집이 크면 거기에 채워 넣을 것도 많아 질 거고 또 청소하려면 힘만 들고..."
"우리 식구만 살집이 아니잖아. 민박집을 하려면 최소한 방 한두 칸은 따로 있어야지."
"민박집?"

나는 아내가 그토록 노래 불렀던 민박집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돈 받고 재워 주는 그놈의 민박집을 꼭 해야 겠어?"
"이제 와서 왜 딴 소리하는 거야. 민박집 하기로 했잖어?"

생각 없이 쉬어 갈수 있는 손님방 한 칸쯤은 더 필요할 것

아내가 그린 능소화
 아내가 그린 능소화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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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보금자리 문제로 또다시 아내와 티격태격하면서 골머리를 싸매다가 무심결에 컴퓨터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시집 한권을 들췄습니다. 윤재철 선생의 시집 <능소화>였습니다. 선생의 시만큼이나 한없이 순수한 선생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둠 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루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 (윤재철 선생의 시집 <능소화>에서)

언젠가 선생의 시를 접하다가 문득 아내의 능소화 그림 한 점을 보내드리고 싶어 선생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부 인사 끝에 전남 고흥으로 이사 갈 예정이라 했더니 평교사 박봉을 쪼개 돈을 부쳐 주셨습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기어코 아내에게 통장 번호를 알아내셨던 것입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감사했지만 선생께서는 오히려 미안하다 하십니다.

"미안하다. 부담되게 공연한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받아 둬. 문예기금이라는 것도 있잖어."
"아이구 참, 선생님도 어려우실 텐디. 뭐라 할 말이 없네유."
"괜찮어, 니 맘 알어..."
"어이구 참...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괜찮데두... 그럼 이렇게 해. 자네 아내 그림 한 점 보내..."
"집 사람 그림이 뭐시가 거시기 하다구유..."
"그림은 그냥... 내 맘 알지?"
"알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공연히 부담 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냥 말여, 그냥 그렇게 해 부담 없이 받어..."

녹녹치 않은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건네주신 선생의 돈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저미게 하는 큰마음이었습니다.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던 윤재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결혼 전, 계룡갑사 주변에서 똥 폼 잡고 한소식 하겠다고 가부좌 틀고 앉아 있을 때 선생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부가 된 성자처럼 묵묵히 법당 주변을 쓸고 또 쓸고 있었습니다.

시집 <능소화> 발문을 통해 문학평론가 김영호 선생이 언급하고 있듯이 윤재철 선생은 '가난해도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온갖 시련에도 굽힘없이 오직 고통을 안으로 삭인 채 삶의 기품을 간직할 줄 아는, 남산골 샌님과 같은 그런 강직한 선비로서의 본이 되는' 선생님입니다.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시인 송기원. 김진경과 함께 푸른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이 맨 먼저 떠오른다. <중략> 그날 실천문학사 주간으로 법정에 선 송기원은 '북괴가 반국가단체임을 아느냐'는 다분히 정치적인 검사의 유도성 질문에 대해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전두환도 김일성 주석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며 재판부를 한순간에 희화화해버렸고, 김진경은 단단히 벼르고 나온 듯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신채호 선생이<조선상고사>에서 밝힌 투쟁으로서의 역사관을 근거로 <민중교육>지 발간의 역사적 의의를 길게 설득해 법정의 분위기를 무겁게 했다.

하지만 윤재철은 "재판장님, 저는 교사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자신의 간절한 심경을 짧게 밝혔는데, 오히려 그 진정성이 긴 여운과 함께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와 법정을 숙연하게 했다.'(윤재철 시집 <능소화>에 붙인 문학평론가 김영호선생의 발문 중에서)

갑사 법당 주변에서 빗자루 질을 하고 있는 선생을 두고 서울대 나온 사람이 저러고 있다고 뒷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빗자루처럼 초라한 선생의 겉모습에서 선생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있는 큰 속 마음자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선생은 어쩌다 지나던 길목에서 우리집에 두 세 차례 찾아 오셨고 나는 간혹 선생께 안부 전화 드렸습니다. 때로는 <녹색평론> 등에 발표한 선생의 시나 산문을 통해 선생을 만났고 선생은 어쩌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보잘것 없는 내 글을 통해 우리 식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시곤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선생을 떠올리면서 아내가 원하는 서른 평 집짓기에 대해 입을 닫기로 했습니다. 민박집을 위한 방 한 칸이든 뭐든 그동안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아온 분들이 찾아오시면 생각 없이 쉬어 갈수 있는 손님방 한 칸쯤은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일손 바쁜 처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목수 일을 하다가 온갖 집짓는 공구를 건네주고 인도 다람살라로 훌쩍 떠났던 막내 동생이 돌아 왔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때맞춰 목수 동생까지 돌아왔으니 이제 건축 설계도를 들고 집만 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집 짓다가 10년을 늙어 버린다는 말이 있듯이 집 짓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태그:#설계도면, #윤재철 시집 능소화, #손님용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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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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